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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산 Nov 15. 2023

10월의 장미

예쁘긴 예쁘다. 그런데 예쁘다는 느낌이 가슴으로 진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출퇴근하는 길에 일터와 붙어 있는 공원을 지나다닌다. 올봄에 공중화장실을 공원 한쪽에 새로 지었다. 화장실만 덩그러니 지어 놓으니까 보기가 안 좋았든지 얼마 안 있어 꽃과 나무로 화장실 주변을 보기 좋게 단장했다. 덕분에 화장실 주변 분위기가 좋아졌다. 


조경공사를 할 때는 어떤 꽃과 나무를 심었는지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제대로 아는 꽃과 나무가 많지 않아 보아도 뭐가 뭔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다 봄기운이 넘치면서 봄꽃들이 하나둘 피기 시작했고, 오월에 이르러서는 장미가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오월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장미가 오월에 꽃을 피우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는 계절마다 셀 수 없이 많은 꽃이 피고 진다. 그 많은 꽃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꽃이 장미다. 누가 좋아하는 꽃을 물으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장미를 말할 만큼 좋아한다. 그렇다 보니 출퇴근길에 마주치는 장미꽃을 볼 때마다 기분이 무척 좋았다. 


그렇게 오월이 가고 계절이 바뀌면서 어느 순간부터 장미꽃은 기억에서 지워졌다. 출퇴근길이라 늘 화장실 옆을 지나다녔는데도 언제부터 잊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장미꽃이 바뀌는 계절에 순응해서 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계절이 바뀌었으니까 장미꽃이 당연히 졌을 거로 생각해 스스로 기억에서 지운 건지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그렇게 장미꽃은 잊혔다. 


나이를 먹으면서 시간이 빨리 간다는 소리가 나도 모르게 입에서 튀어나온다. 오월에 핀 장미꽃을 보면서 좋아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10월하고도 하순에 와있다. 가을이 서서히 오고 있다는 걸 말해주듯이 나무의 이파리들이 조금씩 물들기 시작했다. 무에 그리 급하다고 벌써 땅바닥을 나뒹구는 낙엽도 보인다. 이렇게 변하는 주변 모습에서 가을을 느낀다. 해마다 오는 가을이야 어쩔 수 없지만, 또 이렇게 한 해가 저물어 가는구나 싶어 마음이 울적해진다. 


며칠 전, 여름의 찌꺼기를 지워버리려는 듯이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렸다. 그러고는 마음의 준비도 제대로 못 했는데 날씨가 갑자기 싸늘해졌다. 싸늘해진 날씨에 옷깃을 여미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퇴근길에 나섰다. 늘 지나치는 화장실 앞을 지나가는데 활짝 핀 장미꽃이 눈에 들어왔다. 달랑 한 송이만 피어있는 게 아니라, 화장실 주변의 장미들이 죄다 꽃을 피우고 있었다. 


아니? 장미가 언제부터 피어있었지? 지금이 몇 월인데 장미가 피어있는 거지? 장미꽃이 피어있는 걸 보면 하루이틀사이에 핀 게 아닌데 어떻게 이제야 눈에 보이는 거지? 그동안 화장실 앞을 눈감고 다닌 것도 아닌데. 아무튼 10월에 핀 장미꽃을 보면서 머릿속이 혼란스러웠고 또 한편 신기했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꽃 말고는 특별히 더 아는 게 없다. 그렇지만 장미가 오월의 꽃이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봄이 되어 갖가지 꽃들이 화사하게 피어나면 겨우내 칙칙했던 세상이 환하게 변한다. 서로 제가 봄을 데려온 것처럼 한껏 뽐을 내다가 5월이 되어 장미가 꽃을 피우면 다른 꽃들은 장미꽃 앞에 허리를 숙여야 한다. 그렇게 5월을 지배했던 장미가 10월의 끝자락에도 피어있으니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혹시나 해 인터넷을 뒤져보니 여기저기서 10월의 핀 장미꽃 이야기가 올라와 있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내 마음속의 장미꽃은 영원히 5월에 존재할 뿐이다. 여름이 가고 가을로 접어드는 계절에 꽃을 피우고 있어 대견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안쓰럽게 보였다. 무슨 미련이 그리도 많아 제때 지지 못하고 이렇게 피어있는 걸까? 이게 삶에 대한 애착인 건지 욕심인 건지 모르겠다. 10월에 피어있는 장미가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어찌 보면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한 대장정에 오른다. 다만 그 길이 멀고 길다 보니까 잊고 살 뿐이다. 이 세상 어느 사람도 삶의 종착지에 빨리 가려고 하지 않는다. 빨리 가기는커녕 단 하루 아니 단 몇 분 몇 초라도 늦게 가려고 한다. 그런데 세월이라는 무지막지한 놈이 겨드랑이에 팔을 끼고는 사정없이 잡아끈다. 고지식하기 이를 데 없는 이 녀석은 잠시 잠깐도 쉬지를 않는다. 


어려서는 가는 세월이 두렵지도 아쉽지도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하루라도 빨리 가기를 바랐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은데 시간은 약을 올리듯이 더디게 갔다. 그렇게 더디 가던 세월이 어느 순간부터 총구를 벗어난 총알처럼 빠르게 흘러간다. 어려서 시간이 빨리 갔으면 하고 그렇게 안달할 때는 모른 척하더니 원치 않는 인제 와서야 빨리 가는 세월이 정말 얄밉다. 시간은 나이를 먹은 만큼의 속도로 간다고들 하는 데 그것도 아닌 것 같다. 한 달이 일주일처럼 후딱 가는 걸 보면 나이의 몇 곱절의 속도로 가는 게 틀림없다. 


주변 지인들의 부모님이 한분 두분 돌아가실 때, 우리 부모님은 절대 돌아가시지 않을 거라 굳게 믿었다. 왜 그렇게 엄청난 착각을 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영원히 곁에 계실 줄 알았던 부모님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 돌아가신 것도 안타까운데, 세월에 치여 때론 부모님의 얼굴마저 흐릿해질까 두려울 때가 있다, 아직은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의 나이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날이 훨씬 적다는 걸 생각하면 정신이 번쩍 든다. 


아주 가끔은 인생의 종착역에 다다랐을 때가 어떨지 궁금하다.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운명이고, 정해진 자연의 섭리이기에 한 번쯤 생각하게 된다. 그렇지만 딱히 어떤 그림이 상상되지 않는다. 혼자만의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물리적으로 남은 세월보다 마음속의 세월이 아직 많이 남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인가 보다, 요즘은 나이 든 사람들이 운동을 많이 한다. 오래 살려고 열심히 운동하는 게 아니라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보아도 살아생전에 건강하게 사신 분은 떠날 때도 건강하게 가시는 것 같다. 


한 해 두 해 주워 담은 세월의 무게가 이젠 제법 묵직하다. 그 때문인지 지금껏 크게 느끼지 못했던 가을을 타는 것 같다. 아직은 가을이라고 말하기가 조심스러운데 벌써 가슴 한쪽이 뻥 하니 뚫려있다. 작년까지만 해도 가을이니 뭐니 하는 느낌이 딱히 없었는데 올핸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올해는 안 하던 가을 앓이를 할 모양이다. 


가을이 되면 저녁노을이 다른 계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하고 아름답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붉디붉은 노을이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의 삶도 막바지에 한 번쯤 멋지고 화려하게 보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요즘은 봄가을이 없다. 봄이다 싶으면 무더운 여름이고. 가을이다 싶으면 어느새 겨울에 서 있다. 겨울이 오는 게 무서울 건 없지만. 한 해가 끝났음을 알리는 게 아쉽다. 기세등등한 동장군이 세월을 꽁꽁 얼려서 잠깐이라도 꼼짝 못 하게 해놓으면 좋을 텐데. 그렇다고 가는 세월에 맥없이 끌려갈 수만 없다. 가을날의 화려한 저녁노을처럼 멋진 인생의 후반을 만들어야 한다. 그동안 마음속에만 담아두었던 버킷리스트를 하나씩 시작해봐야겠다. 영어 회화 공부도 하고, 어반 스케치도 해봐야겠다. 그러고 보니까 10월의 장미는 삶의 미련이 남아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멋지게 마무리하려고 화려하게 피어있는 것 같다.          

                                                                                                                           (2023. 10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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