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렇게 공부를 좋아하는지, 대학원 첫 학기의 첫 수업에 다녀와서 깨달았다. 세상 어딜 가든 자신이 무엇에 중심을 두고 열심을 쏟아야 하는지 결정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이리도 가슴 벅차게 즐거운 것이었지... 잊고 있던 동지애를 다시금 느꼈다. 이곳에서 이런 사람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그다음 단계를 그려나가는 이 시간을 위해 나는 공부를 시작했구나. 이런 것들을 깨닫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사실 학기가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서른이 넘어 새롭게 시작하는 공부에 대한 막연함과 설렘이 공존하는 상태였는데 캠퍼스에 가서 교수님을 만나고 사람들과 소통하며 흐름이 반전되기 시작했다. 호주의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캠퍼스를 걷는 것만으로도 다시 학생이 된 것이 실감이 나고 신나는데, 같은 전공을 듣는 프랑스 친구를 오리엔테이션에서 만나 이 프로그램을 선택한 이유를 이야기하기 시작했을 때 깨달았다. 아... 세상은 역시 넓었구나. 세상 보는 눈이 넓어져야겠다.
갑자기 분위기 '공부기 가장 쉬웠어요' 모드다.
같은 시대적 배경에서 자란 사람들끼리 공유하는 기본적인 사고의 흐름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해 왔는데, 그 흐름에 대한 예상치가 아주 많이 엇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무엇을 기대해도 그 기대 밖의 생각과 경험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면서 문화권의 차이란 정말 크구나,라는 것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지금 시작한 개발학 석사 프로그램만 해도 프랑스, 인도, 파키스탄, 영국, 미국 그리고 호주 국적의 친구들과 한국 출신인 내가 함께한다. 각각의 친구들은 다양한 NGO 경력과 또 각자의 분야에서 다양한 나라들을 이동하며 경력을 쌓아온 사람들이다. 내가 섣부르게 예상했던 크리스천 마인드셋의 백인 중심 구성원들이 아니었고, 각자가 이 프로그램을 선택한 이유 또한 달랐다. 몇 주간 우리는 수업에서 각자의 전공과 경력을 살려 어떤 부분을 수업에 기여할 수 있을지 회의했다. 서로 관심분야를 적어서 과제를 위한 그룹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 정했다. 수업은 상대평가가 아니었고, 강의가 아닌 토론과 참여로 이뤄졌다. 수업은 주로 그 주의 주제에 대해 텍스트를 읽고 리서치해서 서로 의견을 나누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혼자 공부하는 것보다 같이 공부하는 것이 왜 도움이 되는지, 내가 영어로 공부하느라 놓치는 부분을 다른 이들의 의견을 들으며 채워나가고 있다.
SBCC(Social-Behaviour Change Communication)에 대한 공부를 하기위해 뉴사우스웨일즈 주립대학교의 개발학 석사 프로그램에 지원했다.
한국이라는 좁고 자원이 귀한, 지리적으로 열세해서 늘 침범을 받아 작지만 매운 고추 같은 강단을 가진 나라에서 치열한 경쟁은 기본값이었다. 그러니 나로서는 같이 수업을 듣는 친구들이 동기이지만 경쟁자가 아니라는 것이, 그래서 서로가 가진 부족함이 아니라 함께 만들 수 있는 시너지에 집중한다는 것이 마음에 얼마나 큰 위안을 가져다주었는지 모른다. 상대평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난 뒤부터 모르는 걸 손을 들고 질문하는 게 망설여지지 않았고, 어떤 토론에서도 내 의견을 조금이라도 이야기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자신을 마케팅 백그라운드를 가졌으며 행동변화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싶어서 이 프로그램을 선택했고, 이번 학기는 첫 학기이며 NGO와 난민 관련 수업을 들을 것이라고 소개했다. 한국에서 왔고 호주의 모든 것이 새로워, 특히 자연과 날씨가 좋은 호주에 다양한 문화권에서 온 구성원들이 모여있어서 너무 감동적이야,라고 말했다. 그리고 전공의 영향이 크겠지만 지금까지 내가 만난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다양성을 사랑하는 것 같다.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조금 발전한 것은 ‘나는 한국에서 왔는데, 한국은 이런 나라야’라고 듣는 이의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 이상한 열등감에 빠져 깊은 동굴을 파고 들어가지 않는 법도. 새로운 공부를 하면서 만나는 챌린지는 나만 갖는 게 아니라는 것, 제2외국어로 공부를 해서도 아니고 내가 이쪽 분야에 문외한이어서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나를 포함해서 대부분이 자신의 삶과 공부를 저글링 하면서 석사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니 그 어느 것도 열정만으로 되는 일은 없을 거야, 전략도 그걸 실행할 자기 관리 능력도 모두 체력이 뒷받침해주어야 한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삼십 대에 일과 공부와 사랑을 다 잡으려면... 결국은 식단과 운동이네요.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는 법이어서, 새로운 시작과 함께 풀타임으로 공부하고 일하는 삶에 대한 고민도 찾아왔었다. 어떻게든 잘 헤쳐나가 보려고 노력하는 와중에 뜻하는 대로 되지 않아서 마음에 생채기가 나는 사건도 있었다. 이것도 다 단단해지는 과정이구나, 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혹시 어떻게 이런 것도 제대로 못하냐고 누군가 날 다그칠 땐, 내 진가를 알아보는 눈이 없는 사람의 의견은 한 귀로 듣고 흘리면 된다. 대신 오늘도 새로운 걸 시도해 본 나에게 무한한 토닥임을 안겨주자. 안 해보고 새로운 걸 시도하는 1의 노력이 결국 100의 결과물을 만들 수 있다는 걸 (내가 애정하는 동생 WY의 말에서 인용함) 잊지 말자.
“If you don’t transform your suffering, you will transmit it.” - Richard Rohr
그저 기억할 것은 내가 상처를 치유하지 않으면 다른 이들에게 그 상처를 전수하게 된다는 것뿐. 상처를 안 받을 수 있으면 가장 좋지만, 받았다면 그 상처를 거울삼아서 나를 돌아보면 된다. 분명히 언젠가 단 한 번은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식으로 상처를 줘왔을 테니까. 그때의 내 모습을 반성하고 고쳐나가는데 집중하는 게 나에게 백번 좋다. 화내고 욕해봤자 상대방은 모르고, 고쳐지지도 않기 때문에 내 에너지는 낭비되고 나는 나대로 지칠 뿐이다... 그런 사람들은 나중에 돌고 돌아 인생이 또 교훈을 줄 거다. 내가 이번에 교훈을 얻은 것처럼. 인생에서 아무리 잘 헤쳐나가 보려고 해도 잘 안 되는 순간이 있지만, 또 그 순간을 이겨내면 거짓말처럼 에너지가 상승되는 시기가 오는 것 같다. 오르락내리락하면서도 결국에는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는 우리들의 인생 곡선을 보면, 함께 오르막길을 걸어가고 있는 동지들이 보인다. 누가 약하고 강하고를 따지는 그 시선을, 그리고 승자와 패자를 나누는 경쟁 방식을 버리면 우리 모두가 다 동지다. 동지들이여, 모두 지금 있는 곳이 어디든 그저 자신만의 싸움을 해 나가길. 그리고 지치면 잠시 걸어온 길을 바라보며 감상하는 시간도 갖길 바란다. 다른 이들이 걸어온 길을 따라 걷지 않는 그 유니크함이 진짜 멋진 거니까.
그래서 오늘도, '오피스잡 말고 다른 일 어디까지 해봤니’에서 매 회 새로운 에피소드 갱신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