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사리 Jun 16. 2023

완결되지 않은 삶을 살아갈 권리

벌써 대학원 첫 학기가 다 지나갔다.


2021년 4월 텀블러(Tumblr)에 남겼던 글을 가져오면서 일부를 수정하였습니다.





여러 국적의 친구들과 함께 그룹 프로젝트를 하고, 또 혼자서 리서치를 하고 생각을 발전시켜서 아카데믹 페이퍼를 쓰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성취와 절망들이 한데 뒤엉킨 시간들을 보냈다. 지금은 마지막 과제들을 하고 있는 중인데, 두 가지 과제의 데드라인이 겹쳐있어서 머릿속을 200% 활용해야만 하는 상황. 거기다가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파트타임으로 일을 시작했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너무 따듯하고 인간적이어서 이곳에 가는 것이 내 삶의 낙이자 놀이가 되었다.


한편으로는, 리테일 세일즈 어시스턴트로 일하며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이 일 하는 게 너무 재밌어서 일에 몰입하다 보면 공부에 몰입할 에너지가 상대적으로 줄어들기도 하였다. 집에 와서 샤워하고 나면 책상에 조금 앉아있는 척하다가 잠들기 일쑤, 어째서인지 즐겁지만 조금 에너지가 달리기도 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공부와 일을 병행하는 게 조금 무리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그렇지. 책상머리에 앉아서 하는 공부는 그래도 에이전시에서 일하면서 얻은 근력(?) 같은 게 있어서 하겠는데, 문제는 나가서 하는 공부 즉 커뮤니케이션에 있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가장 어려운 게 커뮤니케이션, 즉 영어이고 또 문화였다. 더 큰 세상에서 더 많은 이들과 함께 일하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이 장애물을 넘어서야만 한다는 생각에 커뮤니케이션 스킬 늘리는 것에 늘 진심인 편인데도 참 쉽지가 않다. 확실히  세미나 혹은 토론에서  의견을 이야기하고, 서로 합의점을 찾는 과정들이 모국어를 쓸 때와는 완전히 다른 것 같다. 영어도 영어지만 내가 이 필드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혹은 순발력이 부족해서 참여하지 못하는 것 같다. 토픽 자체는 알겠는데 친구들이 무슨 얘기하는지 모를 때도 있다. 특히 이번학기 마지막 수업에서는 거의 수업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러나 고무적 이게도, 이 모든 것들이 아주 조금씩 느리게 나아지는 게 눈에 보인다. 영어만을 탓하기보다 그냥 공부를 더 하면서 쌓아야 하는 짬바(짬에서 오는 바이브) 같은 것들도 분명 있어 보인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 뼈를 깎는 고통을 느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지는 않다. 어떻게 보면 나태해 보일 수도 있지만, 나는 지치지 않고 조금씩 나아가서 롱런하는 방식을 택했다. 무엇이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시점은, 한 번에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이니까. 너무 갑자기 앞으로 나아가려고 할 때, 모든 의욕이 꺾이면서 ‘난 못할 것 같아’라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우주를 구하고 지구를 구한다 한들, 나를 구하지 못하면 안 되는 것 아닐까. 나의 욕구를 먼저 채워주고 그리고 내 주변을 꽤 충분히 돌봐준 이후에 그다음의 일들도 내다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야 자연스럽지 않을까. 내가 속한 하루를 그리고 눈앞에 닥친 일들을 그저 묵묵히 해나갈 때 비로소 안정적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일을 잘 끝내야 내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는다는 거창한 부담감은 다 내려놓고, 그저 나는 나의 길을 갈 테니 너도 너의 길을 가라, 정도의 마음으로 묵묵히 닥친 일들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되어있겠지. 나의 부족함과 불완전함을 동력 삼아 성장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저 Status Quo, 즉 현재 상태에 머물러있지 않겠다는 다짐은 오늘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드는 내게 조금은 위안이 될 것 같다. 관계도 사랑도 일도 공부도 지금 당장 모든 게 맘에 들진 않지만, 이걸 개선하기 위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확신마저 없으면 우리는 무엇을 붙잡고 살아가야 할까.  


이놈의 제2외국어는 언제쯤 익숙해질지 모르겠지만, 삼개국어 또는 사개국어 하는 친구들도 있는 마당에 겨우 영어 하나 더 배우는 걸 거창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현 상태를 받아들이고 또 이 핸디캡을 갖고도 기죽지 않는 법을 터득해야겠다.


다음 달엔 조금 더 말랑말랑한 토픽으로 돌아오길 기대하며.





원문 링크 - https://www.tumblr.com/fearless-grace/648991143488634880

작가의 이전글 길고 긴 터널을 지나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