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ZA의 Good days와 더위가 사라진 여름밤
퇴근길, 버스에서 내리니 9시 30분이었습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버스에서 내리면 뜨끈하고 물섞인 바람이 몸을 휘감아 불쾌했는데, 오늘은 선선한 바람이 얼굴을 살랑살랑 건드렸습니다. 이제 더위가 떠나간다는 생각이 들면서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사람은 언제나 기대보다 단순합니다.
버스에서 요리 영상을 잔뜩 본 탓에 집에 가면 고기를 구워 먹으리라, 와사비에도 찍어먹고, 트러플 오일에도 찍어 먹고, 다양한 먹부림을 부려 보리라 다짐 했습니다. 하지만 집에 있기엔 너무 아까운 날씨라 결국 달리기로 마음을 바꿨어요. 집에 도착하자마자 소파가 몸을 잡아채기 전에 얼른 옷을 갈아입고 다시 밖으로 나왔습니다. 아파트 1층을 나서며 달리기 기록 어플을 켜고, 음악 스트리밍 앱도 실행했습니다. 오늘 같은 날씨에 듣기 위해 아껴둔 곡이 있었거든요.
음식에는 제철이 있습니다. 생선을 사랑하는 저는 제철 회는 되도록 챙겨 먹으려고 합니다. 생선은 기름이 가장 많이 올라올 때가 제철이라고 하는데, 제철에 맞춰 생선을 먹어야 퍼석거림 없는 맛있는 회를 먹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름에는 부시리, 가을에는 잿방어, 겨울에는 방어를 먹어야 기름지고 고소한 맛을 온전히 느낄 수 있어요. 특히 겨울 방어는 기름이 많이 올라 탱탱한 살코기에서 느껴지는 고소함이 최고조에 달하는데, 간장이나 소금에 살짝 찍어 먹으면 더욱 풍미가 살아납니다. 여름에는 성게를 먹어야 하는데, 갓 잡은 성게는 단맛이 풍부하고 씁쓸한 맛이 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성게가 녹아 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 첨가한 명반에서 쓴 맛이 나기 때문입니다. 정말 맛있는 성게를 먹고 싶다면 여름철 강원도 고성을 방문해서 성게를 먹어 보는 것을 추천드려요. 과일도 제철에 먹어야 제 맛입니다. 여름엔 시원한 수박과 복숭아가 생각나고, 겨울엔 귤과 오렌지, 천혜향, 한라봉이 빠질 수 없습니다. 손이 노랗게 될 때까지 까먹는 귤의 상큼함은 겨울에만 느낄 수 있는 즐거움 중 하나죠. 이처럼 음식은 그 맛과 분위기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제철이 있습니다. 아. 그런데 저에게 있어 육고기는 예외입니다. 저는 돼지고기, 소고기, 양고기를 매철이 제철인 것처럼 먹으니까요.
이렇게 제철에 대해 길게 이야기한 이유는 음악에도 제철이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입니다. 음식이 가장 맛있을 때가 있는 것처럼, 음악도 가장 맛있을 때가 있습니다. 특히 음악이 날씨와 통하며 더 빛을 발하는 순간이 있어요. 저는 날씨와 기분에 따라 듣는 음악이 몇 가지 있습니다. 기분이 몽글몽글해지고 괜히 이성에게 대시를 해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봄에는 The 1975의 ‘Sincerity is scary’처럼 통통 산책하는 느낌의 곡을 듣습니다. 이 곡을 들으며 걷다 보면 몸이 앞이 아니라 위아래로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끈끈함이 한가득인 여름에는 노래로 청량감을 더해줘요. 개인적으로는 저스틴 비버의 ‘Sorry’나 위너의 ‘Island’, ‘끼 좀 부리지 마’ 같은 곡들을 들으면 더위가 잠깐 가시는 기분이 듭니다. 저는 가을을 좀 타는 편이라 우울해지거나 고독 해지는 노래는 피하려고 합니다. 대신 비기나 에미넴의 노래를 듣거나 우리나라 걸그룹의 소위 ‘쇠맛’나는 노래를 찾게 돼요. 해를 떠나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겨울에는 코가 시큰해질 정도로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존 레전드 ‘How can I blame you’나 샘 스미스의 ‘I’m not the only one’처럼 웅장하고 따뜻한 목소리를 들으며 그 온도차를 즐깁니다.
2024년 9월 3일, 오늘, 아파트 단지를 나서며 재생한 곡은 SZA의 ‘Good Days’였습니다. 이 곡을 처음 알게 된 건 재작년 여름이었어요. 그 당시 박사 과정을 밟고 있었던 저는 머리를 식히고 싶을 때마다 밤바다를 찾았습니다. ‘Good Days’를 처음 알게 된 날도 오늘과 날씨가 비슷했어요. 낮에는 열기와 습기가 있지만 밤이 되면 공기가 차갑게 식고 건조해지는, 여름과 가을이 바통을 같이 잡고 있는 때. 스트리밍 앱으로 랜덤 재생하다가 이 노래가 재생되었습니다. 파도 소리만 들리고, 부서진 파도 조각만 이따금씩 보이는 바닷가에서 그 곡을 들으니 바다는 하늘처럼, 부서진 파도의 잔해는 별처럼 느껴졌고, 그 기분이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이런 날씨나 차분해지고 싶은 날엔 이 곡을 듣습니다. 제 서사와 감정을 담을 수 있는 곡이 있다는 것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