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생활자의 꿈
낯선 영토로의 망명 시도
아쉽게도 나는 그곳에서 어떤 노래를 불렀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이십 대라는 긴 시간을 오로지 '노래'에 기대어 온 내게 취업의 문턱이 낮을 리 없었다. 남들이 도서관에서 단단한 스펙을 챙길 때, 나는 무대 위에서 있었다. 당연하게도 뒤늦게 뛰어든 취업 시장에서 내 이력서는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대학 시절, '음악만 하는 놈'이라는 소리를 듣기 싫어 악착같이 챙겼던 학점이 겨우 3.0을 넘었다는 사실만이 내 마지막 자존심의 보루였다.
알량한 자신감은 여러 번의 낙방 끝에 너덜너덜해졌으나, 운 좋게도 한 호텔의 최종 면접 통지서가 날아들었다. 단 다섯 명을 뽑는 신입 공채에 40여 명의 최종 후보가 면접장을 찾았다. 불가능이라고 생각했던 서류 전형을 통과하고 최종까지 온 것 자체가 이미 내게는 기적이었다.
긴장되는 최종면접은 4인 1조로 면접장에 들어가 면접을 보는 방식이었다. 운명의 장난인지 나는 10개 조 중 하필 첫 번째 조에 포함되었다.
"첫 번째 조 입장해 주세요."
진행자의 사무적인 목소리와 함께 열린 면접장의 문 안쪽은 전혀 다른 세계였다. 고급스러운 카펫이 발소리를 집어삼키는 그곳엔 무겁고 엄숙한 정적이 내려앉아 있었다. 사장님과 임원들은 큼직한 창의 역광을 부하직원으로 거느린 것처럼 창가에 등을 지고 위엄 있게 앉아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의자 네 개가 서로 의지하지 말라는 듯 넓은 간격을 두고 덩그러니 배치되어 있었다.
그 위태로운 공간 안에서 나는 유일한 이방인이었다. 이곳에 있기에는 내가 살아온 시간이 너무 달랐다. 나는 나를 깊숙이 숨기고, 어떻게든 이 견고한 분위기에 어울리는 시스템의 부속품인 척 행동해야겠다고 다짐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자, 긴장하지 마시고 편안하게 자기소개부터 시작하죠. 첫 번째 분부터."
첫 번째 지원자는 마치 이 순간만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당당한 기세로 자신을 설명했다. 나도 자기소개 정도야 예상하고 준비했던 터였다. 하지만 그 저변에 깔려 있는 자신감은 흉내 낼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자, 수고하셨습니다. 다음 분 시작해 주세요.”
형벌처럼 내 차례를 기다렸다. 그 순간에 하나도 도움 안 되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 같은 식상한 문구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마침내 마지막 순서인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홍원표 씨, 자기 소개해주세요.”
멋진 연기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연습한 대로 입가에 미소를 지으려 했으나, 거울을 보지 않아도 내 표정이 울상인지 웃상인지 모를 기괴한 표정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침내 입술을 떼려는 찰나, 정적을 깨는 엄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만.”
순조롭던 면접장의 분위기가 일순간 멈춰 섰다. 그 흐름을 깬 건 다름 아닌 사장님이었다.
“홍원표 씨?
“네!”
“홍원표 씨는 성적이 왜 이 모양이죠?”
가면이 벗겨진 자리
방 안의 모든 시선이 나를 향했다. 마치 성스러운 성전에 몰래 숨어든 이교도가 발각된 것처럼 내 정체가 탄로 났다.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살아온 불온한 자가 신성한 이곳을 어지럽히고 있다는 것을 모두 알아챈 것이다. 수치스러웠다. ‘그래. 그럴 줄 알았지.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어.’. 면접을 준비하면서 설마 했던 합격의 상상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순간, 억울함과 화가 동시에 치밀었다. 이럴 거라면 왜 서류 전형에서 나를 걸러내지 않았나. 왜 이곳까지 나를 끌고 와서 확인사살을 하는 것인가. 어차피 탈락은 기정사실이었다. 떨어지더라도 이렇게 비참하게 물러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학교 다니는 동안 공부보다 음악이 좋아서 노래만 했습니다!”
익숙지 않았지만 나는 최대한 건방지고 껄렁한 목소리로 대답하려고 노력했다. 선전포고를 당한 상태였다. 이판사판이었다. 지금까지 쓰고 있던 가증스러운 가면을 모두 벗어버렸다.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을지언정, 내 이십 대는 결코 부끄럽지 않았노라고 온몸으로 외치고 싶었다. 말하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패배자의 퇴장 치고는 제법 근사하다고 생각하던 그때, 사장님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럼 노래 한 번 해봐요.”
성적이 담지 못한 나의 이십 대
만약 당락에 연연하는 순간이었다면 떨려서 제대로 노래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끝을 보았다. 그리고 이 공간 안에서 나만큼 이십 대를 뜨겁게 산 사람이 있냐고 모두에게 반문하고 싶었다.
방법은 하나였다. 나는 누명으로 사형을 집행당하는 죄수가 마지막 억울함의 유언을 토해내듯, 배꼽 밑에서부터 소리를 끌어올려 꺼이꺼이 노래했다. 보여주고 싶었다. 내 이십 대를 뜨겁게 달군 노래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아쉽게도 그때 내가 어떤 노래를 불렀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다른 지원자들이 화려하게 꾸민 말로 자신을 보여주려 했다면, 난 오랜 시간 동안 다듬어진 ‘노래’로 나를 설명했다.
면접장을 나오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탈락은 예정되어 있었지만, 긴 세월 동안 단단하게 쌓아 올려진 거대한 세상 앞에서, 나를 숨기지 않고 오롯이 내 방식대로 보여주었다는 사실이 나를 후련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일주일쯤 지났을까, 호텔로부터 믿기지 않는 전화가 걸려왔다.
"홍원표 씨, 합격입니다! 축하드려요."
입사 후, 사장님께 조심스레 여쭤본 적이 있다. 왜 자격 미달이었던 저를 뽑으셨느냐고. 사장님은 껄껄 웃으며 말씀하셨다. 성적상의 숫자는 모자랐을지 몰라도, 그 공간을 장악하던 당돌함은 기준치를 상회했다고.
그것 때문이었을까. 내가 처음 발령받은 곳은 호텔 영업의 최전방이라 불리는 판촉팀이었다. 후에 입사 동기들에게 전해 들은 후일담은 더욱 걸작이었다. 내가 속한 첫 번째 조가 면접장에 입장한 후, 안에서 난데없는 노랫소리가 흘러나오자 밖에서 대기하던 나머지 36명의 지원자들은 갑자기 패닉 상태가 되어 급하게 장기자랑을 준비하느라 대기실이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가득 찼다는 이야기였다.
이렇게 노래를 지웠던 내 인생은, 역설적이게도 노래를 통해 새로운 인생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제 내 손에는 마이크 대신 호텔의 브로슈어가 들려 있었다. 인생의 두 번째 막이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