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생활자의 꿈
빌딩타기
“여기는 18층 건물이니까, 두 시간 뒤에 1층에서 보자고. 명함 이십 개는 받아와야 한다. 수고해.”
대리님의 짧은 지시가 떨어진 뒤, 나는 강남 한복판의 고층 빌딩 꼭대기에 홀로 남겨졌다. 사무실을 나서기 전, 대리님은 내 이름이 박힌 명함 한 통을 통째로 챙기라고 했다. 아직 잉크도 마르지 않은 것 같은 명함을 어디에 다 쓸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지만, 등 뒤로 서늘한 불길함이 엄습했다.
소위 ‘빌딩타기’라 불리는 무연고 방문 영업. 사전 약속도, 정보도 없이 꼭대기 층부터 1층까지 모든 문을 열고 들어가 내 상품을 파는 일. 판촉팀 신입사원인 내게 주어진 첫 임무였다. 호텔 객실과 컨퍼런스 행사를 유치하기 위해 기업체의 담당자를 확보해야 했지만, 이제 막 노래를 그만두고 입사한 내게 고객이 있을 리 만무했다. 영업은 나처럼 소심한 사람이 아닌 대범한 이들의 전유물이라 여겼던 내게, 이 일은 적응하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입사 성적이 뒤처지는 나 같은 이들에게 주어지는 직무가 영업이라는 근거 없는 자격지심이, 바닥까지 떨어진 자존감을 더욱 짓눌렀다. 선배들 입장에서는 이처럼 무지하고 무자격인 신입사원이 매운 영업의 맛을 단박에 느낄 수 있게 하는 방법이 ‘빌딩타기’였다.
수치심이라는 가장 어두운 그림자
대리님이 사라진 복도에서 나는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생면부지의 사무실에 들어가 명함을 건네고 거절의 눈빛을 견뎌야 하는 일. 그 두려움 속에서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군 시절을 보낸 공항 경찰관서에 드나들던 보험설계사 아주머니였다. 사람들은 그녀를 반기지 않았고, 때론 실없는 농담을 던지거나 차갑게 나가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생글거리며 다시 찾아오던 그녀를 보며, 나는 안쓰러움과 모질다는 생각을 동시에 했었다.
그 기억이 현재의 내 모습과 겹치자 상상력은 통제 불능의 상태로 뻗어 나가며 잠시 후에 내게 닥칠 일들을 어둡게 증폭시키기 시작했다.
‘사무실 문을 밀고 들어간다. 사무실 안의 사람들은 힐끔거리며 이방인의 존재를 인식한다. 누가 나에게 관심이 있을지 알 수가 없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조용히 내 방문목적을 밝히려고 한다. 순간, “나가주세요!”라고 어디선가 차가운 목소리가 들린다. 사무실의 모든 시선이 내게 쏠리고, 그 눈빛은 곧 냉소로 바뀐다. 아차! 그 수많은 눈동자 속에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초등학교 때 여자 짝꿍의 얼굴이 섞여 있다. 나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사무실을 뒷걸음질 치며 도망 나온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온몸의 혈관이 얼어붙는 듯했다. 정신의학자 데이비드 호킨스는 그의 저서 《의식혁명》에서 인간을 밑바닥까지 추락시키는 가장 어두운 의식은 죽음의 공포나 두려움보다 깊은 ‘수치심’이라 단언했다. 육체적 위협보다 무서운 건, 타인의 시선 앞에서 무너지는 일이라는 것이다. 만약 내게 주어진 이 일이 매일같이 그런 모멸을 견뎌내야 하는 것이라면, 나는 단 하루도 버텨낼 자신이 없었다.
나는 첫 번째 사무실의 문고리도 잡아보지 못한 채 낯선 건물의 복도에서 족히 한 시간은 혼자 망설였다. 도대체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부족한 나에게 기적처럼 입사를 허락한 회사에 대한 고마움이 원망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남들에겐 사소할 수도 있는 이 일 앞에서 주저하는 스스로가 바보 같아 자괴감이 밀려왔다.
비상계단에서 찾은 결심
그래도 마음을 다잡고 시도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첫 번째 사무실 문의 고급스러움이 다시 내 마음을 쪼그라들게 만들었다. 나는 슬그머니 발길을 돌렸다. 조금 만만해 보이는 다른 사무실의 손잡이를 잡으려던 찰나, 문에 붙은 작은 문구가 나를 멈춰 세웠다.
'잡상인 출입금지'
그 문구는 마치 중국 귀신의 이마에 붙은 부적처럼 내 발을 묶어버렸다. 순간 나는 ‘호텔리어’가 아닌 ‘잡상인’이 되었다. 나는 무너져 내리는 마음을 안고 깊은 어둠을 찾아 비상통로 계단에 주저앉았다. 비참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사람인데, 이제는 사람들이 피하고 싶어 문전박대하는 ‘잡상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내가 이 일밖에 할 일이 없는 사람은 아닐 거라는 밑바닥의 자존심에, 당장 사표를 던지고 이 어두운 계단을 뛰어 내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들어온 회사인가. 남들보다 늦은 시작을 여기서 멈춘다면, 다시는 이런 기회가 오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내게는 미래를 약속한 그 사람이 있었다. ‘검정 봉다리’를 들고 나를 믿어주던 그녀를 생각하니 퇴로가 보이지 않았다. 내 인생엔 더 이상 뒷걸음질 칠 여지가 없었다.
“그래, 어쨌든 할 거라면 빨리 해버리자. 안 되면 어쩔 수 없지만.”
99%의 걱정을 뚫고 피어난 가능성
심호흡을 하고 다시 문 앞에 섰다. 조심스레 사무실 안으로 발을 들이자, 칸막이 너머로 평범한 업무의 풍경이 펼쳐졌다. 가장 인상이 부드러워 보이는 사람에게 다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첫마디를 뗐다.
“저, OO호텔에서 온 홍원표입니다.”
“네? 호텔에서요?”
그는 놀란 듯 벌떡 일어나 명함을 받았고, 나를 상급자에게 안내했다. 상급자 역시 뜻밖의 방문에 당황하면서도 정중하게 내 인사를 받아주었다. 수없이 연습한 멘트를 건네고 그의 명함을 받아 들고 사무실을 나왔을 때, 비로소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걱정했던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헛웃음이 났다. 왜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위해 스스로를 고통 속에 밀어 넣었을까. 두 번째, 세 번째 방문이 이어질수록 명함 지갑에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의 이름이 쌓였고, 내 마음속에는 이전에 없던 ‘용기’라는 근육이 붙기 시작했다.
훗날 데일 카네기의 《행복론》에서 ‘우리가 걱정하는 일의 99%는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문장을 읽었을 때, 강남의 그 어두운 비상계단이 떠올랐다. 그 경험은 영업 인생 내내 내 앞을 비추는 등불이 되었다.
하지만 모든 방문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몇 군데의 사무실을 지나칠 무렵, 드디어 내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실제 상황'이 눈앞에 펼쳐졌다. 한 사무실에 들어가 담당자를 찾던 중, 짜증이 잔뜩 서린 얼굴을 한 남자가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업무 방해하지 말고 당장 나가세요!"
서늘하고도 거친 목소리가 적막한 사무실을 갈랐다. 모든 직원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꽂혔다. 내가 그토록 상상하며 괴로워했던, 비상계단에서 나를 주저앉게 했던 그 공포가 현실이 된 것이다.
불과 한두 시간 전의 나였다면, 아마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채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어떤 문고리도 잡지 못할 만큼 깊은 내상을 입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 동안 겪은 몇 번의 성공은 내 심장에 생각보다 두꺼운 굳은살을 입혀놓고 있었다. 당황하는 대신, 내 입에선 뜻밖에도 뻔뻔하리만큼 당당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니, 담당자분께 명함 한 장 전해드리겠다는 게 이렇게까지 화를 내실 일입니까?”
적반하장에 가까운 나의 당당한 태도에 오히려 당황한 쪽은 상대방이었다. 기세에 눌린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조금 전의 고압적인 태도를 거두고 오히려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연신 꾸벅거리며 내 명함을 공손히 받아 들고는 담당자에게 꼭 전달하겠노라 약속했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묘한 쾌감을 느꼈다. 어두운 비상계단에 앉아 자신의 보잘것없음을 한탄하던 초짜 영업사원은 그곳에 없었다. 타인의 시선이라는 감옥에서 스스로 걸어 나와, 비로소 세상이라는 무대 위에서 제 몫을 할 수 있는 진짜 영업사원으로서 한걸음을 뗀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잡상인이 아니었다. 나는 내 미래를 직접 일궈가는 ‘호텔리어’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