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힘찬 시작

이중생활자의 꿈

인생에서 마주하고 싶지 않았으나 비껴갈 수 없는 장면들이 있다. 내게 그 첫 기억은 '불주사'로 불렸던 공포의 BCG 접종이었다. 나는 6학년이 되었다는 설렘보다 곧 마주치게 될 불주사의 악몽에 속절없이 짓눌렸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주사기를 재사용하기 위해 알코올램프의 불꽃에 주삿바늘을 잠깐 달궈 소독한 뒤 주사하는 방식이었다. 게다가 접종 후엔 어깨 위에 콩 반쪽만 한 혹을 남겼다. 나의 무한한 상상 속에서 벌겋게 달궈진 주삿바늘이 몸에 닿기도 전에 나는 수백 번의 통증을 미리 겪어야만 했다.


하지만 불주사를 백 번 맞는 고통을 감수하더라도 피하고 싶은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단연 대학 입시였다. 그 시절 나는 입시에서의 실패란 곧 생의 몰락이라 믿었다. 하루하루가 마치 나의 정신과 육체를 시퍼런 알코올램프의 불꽃 위에서 달구는 듯한 나날이었다. 행여 실수라도 한다면 인생에 지울 수 없는 거대한 혹을 남길 것 같았다. 대범하지 못한 내게 입시는 큰 벽이었다. 오죽하면 수십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다시 시험지를 마주하는 꿈에 소스라치며 깨곤 할까. 하지만, 나는 대학 진학을 위해 소중했던 음악마저 포기해야 했다. 그저 하루빨리 이 터널을 지나 마음껏 노래하고 싶었다. 누구나 그랬겠지만 뜨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대학 진학에 성공했다.


대학 입학은 나에겐 음악의 한을 푸는 신호탄이자, 금지됐던 음악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자유이용권이었다. 합격하자마자 캠퍼스의 낭만을 꿈꾸기도 전, 나의 최대 관심사는 노래할 곳을 찾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전공이 속해 있는 단과대의 학생회가 주최하는 입학 전 오리엔테이션에 참가하게 됐다. 거기서 과동기들도 처음 만나 인사하고, 그들과 함께 학생회가 준비한 여러 프로그램들에 참여하게 됐다.


오리엔테이션은 흥미롭게 진행됐다.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진행되고 마지막 순서에 다다를 무렵 행사장이 소란스러워졌다. 선배들이 분주하게 단상 위로 악기를 나르는 걸 보니 아마 공연이 있는 모양이었다. 준비가 끝나자 사회자가 말했다.


“신입생 여러분, 마지막 순서로 여러분들의 입학을 축하하기 위해 우리 단과대의 자랑 사회대 노래모임 더불어 사는 소리가 공연을 준비했습니다. 큰 박수로 맞이해 주세요!”


가슴이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선배들의 공연이라니. 문득 고등학교 1학년의 어느 날 마주했던 선배들의 축제 무대가 떠올랐다. 충격적이었던 그들의 공연은 감동을 넘어 내 인생의 방향을 바꿀 뻔했다. 하지만 나는 아프게도 나의 축제를 포기했야만 했다. 그런데 다시 내 앞에 생각지도 못한 선배들의 공연이 있었다.


호기심에 가득 찬 신입생들의 박수소리에 맞춰 소개받은 선배들 열댓 명이 무대 위로 올랐다. 몇 명의 악기 연주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마이크를 잡고 노래하기 시작했다. 노래는 밝고 신났다.


“우리 하나가 된다는 것은 더욱 커지는 일이라~.”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노래였다. 노래풍도 색다르고 가사도 평소 듣던 노래와는 많이 달랐다. 게다가 프로페셔널 가수가 아니니 가끔은 음이 어긋나기도 하고 호흡이 거칠게 끊기기도 했다. 하지만 무대 위에서 서로 눈을 맞추며 노래하는 선배들의 표정은 밝았다. 그들의 노래는 신입생인 우리들에게 앞으로 잘해보자고 말하는 듯 편안했다. 그리고 적어도 노래하는 그 순간만큼은 자기 인생의 가장 뜨거운 지점을 지나가는 듯 진지했다. 내 가슴은 계속 두근거렸다. 그리고 그들이 몹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공연이 끝나자 오리엔테이션은 마무리됐다. 돌아가는 길에 학생회에서 신입생들에게 몇 개의 기념품을 나눠줬는데, 그중에 카세트테이프 한 개가 끼어 있었다. mp3는커녕 CD도 대중화가 안된 시기였다. 그 테이프에는 ‘사회대 노래모임 더불어 사는 소리’라는 라벨이 붙어 있었다. 공연했던 노래패가 직접 녹음한 곡이 십여 곡 수록돼 있었다.


놀라웠다. 직접 음반을 만들었다고? 나중에 알게 됐지만 그 음반은 노래패 구성원들이 만든 노래를 노래패 회장의 집에서 직접 녹음해 만든 음반이었다. 일종의 홈레코딩이었다. 지금이야 넘쳐나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통해 직접 자신의 음원을 만드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다. 집에서 혼자 음원을 만들기도 하지 않나. 그러나 당시에는 홈레코딩이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했다. 일반인들에게 음원을 만들고 음반을 제작하는 것은 연예계의 메커니즘 안에 들어가야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됐다. 그런데 그것을 직접 했다니.


집으로 돌아와 입학하기까지 한 달 여의 시간이 있었다. 그 기간 동안 나는 선배들이 준 테이프를 수도 없이 반복해서 들었다. ‘테이프가 늘어질 정도’로 들어 노래들을 모두 외워 버렸다. 오리엔테이션 공연 현장에서는 미처 알지 못했던 노래의 의미도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보이지 않는 선배들의 숨소리와 악보를 짚어 내려가던 표정까지 눈앞에 그려질 즈음, 나는 인사도 나누지 않은 그들과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음속에서 벌써 그들의 일원이 된 것이다. 주저할 것이 없었다. 나는 1학년 1학기 개강 첫날, 회원 모집 공고도 내지 않은 노래패의 문을 두드렸다.


알고 보니 내가 가입한 노래패는 민중가요를 만들고 부르는 동아리였다. 불의에 저항하고, 민주적이며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의 열망을 담은 음악인 민중가요. 내가 대학에 입학했던 시기는 평범한 시민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죽어갔던 80년 광주의 5월로부터 겨우 십여 년이 흐른 시점이었다. 그리고 군부의 독재를 겨우 종식시켰지만 다시 군인이 권력을 잡은 시대였다. 어두운 시대였다. 세상은 평등, 균형, 합리와 같은 단어들에 ‘아니 불(不)’자만 붙이면 모두 설명이 되는 그런 시대였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에 맞서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고자 하는 사람들의 의식과 행동이 역동하던 시대였다. 고등학교 시절, 대학에 먼저 들어간 누나의 책꽂이에 꽂혀 있던 범상치 않은 제목의 책들을 자주 훔쳐봤다. 그것들을 읽고 그때까지 내가 아는 사실이 다가 아니라는 걸, 학교에서 배운 세상이 틀릴 수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며 불에 덴 듯 가슴 뜨거워지던 나였다. 풋내 나는 정의감에 민중가요를 하게 된 것이 오히려 잘 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열망했던 노래를 시작했다. 매일 동아리에서 노래하는 것이 너무 좋았다. 내가 노래하는 것을 막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자연스럽게 강의실보다 동아리방을 찾는 횟수가 더 많아졌다. 민중가요에 심취했고, 그 노래가 꿈꾸는 세상을 위해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학업은 뒷전이었다. 1학년 1학기, 2학기 모두 학사 경고를 받았다. '한 번 더'는 곧 어렵게 들어간 학교에서 제적을 의미했다. 그만큼 음악은 내 인생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1학년에 불과한 나에게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