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생활자의 꿈
멈춰버린 노래, 엇갈린 운명
인생의 가장 뜨거웠던 한 페이지, '조국과 청춘'에서의 활동이 정점에 다다를 무렵, 세상은 내게 잠시 쉼표를 찍으라 명령했다. 청춘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던 활동을 뒤로하고 국방의 의무를 다해야 했다.
입대 후의 삶은 얄궂었다. 육군으로 입대했건만,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전투경찰’이라는 낯선 이름표였다. 운명의 장난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발령받은 기동대는 공교롭게도 나의 모교인 한양대 근처에 자리 잡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어깨동무를 하며 민주주의를 노래하던 교정의 담벼락 너머에서, 나는 이제 친구들을 진압하기 위한 훈련을 받으며 곤봉과 방패를 든 채 서 있어야 했다. 내가 지키고자 했던 가치와 내가 수행해야 하는 임무 사이의 괴리는 내 마음을 서늘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다행히 발령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내 군 생활의 종착지는 김포공항으로 바뀌었다. 입대 후 멱살 잡히듯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롤러코스트를 타는 인생이었지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내 안의 노래는 억눌린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제대를 반년 앞둔 어느 평범한 오후, 김포공항으로 면회 온 '조국과 청춘'의 한 선배는 내게 뜻밖의 제안을 건넸다.
"원표야, CBS 통일가요제라고 있는데 한번 나가보는 게 어때? 노래는 내가 만들고 네가 부르고."
선배의 한마디는 내 가슴속에서 사그라지던 불씨에 던져진 한 점의 기름이었다. 멈춰버린 줄 알았던 심장이 다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영창과 휴가 사이, 기적의 변주곡
가요제 도전은 그 자체로 운명의 시소 같았다. 1차 서류 전형은 무사히 통과했고, 오디션 형식의 2차 예선은 금쪽같은 외박 신청을 털어 참가했다. 3차 최종 예선 날짜는 운 좋게도 제대 전 마지막 정식 휴가 기간과 맞물렸다. 하늘이 돕는 것일까. 나는 당당히 본선 진출 확정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난관이 앞을 가로막았다. 본선 무대는 휴가가 끝난 뒤에 예정되어 있었고, 내게 남은 휴가는 단 하루도 없었다. 고민 끝에 정공법을 택했다. 상부에 가요제 본선 진출 사실을 솔직하게 보고했고, 특별 외박을 간곡히 요청했다. 그래도 방송국에서 주최하는 가요제이니, 상부도 신기하고 대견해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돌아온 반응은 예상과 정반대였다. 당시 권위주의적이었던 경찰 상부의 시선에 'CBS'라는 진보적 색채의 방송사와 '통일가요제'라는 명칭은 불온하기 짝이 없는 단어들의 조합이었다. 상부의 지침을 받은 직속상관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너 영창 갈 수도 있을 것 같아. 어쩌자고 보고도 안하고 가요제를 참가했어? 분위기가 안 좋아. 당장 포기하는 게 좋겠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꿈에 그리던 무대가 손을 뻗으면 닿을 곳에 있었다. 하지만, 가요제는 고사하고 군대 말년에 영창이라니. 군인이라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 슬펐고, 나의 꿈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기만 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직속상관이 나를 다시 호출했다. 징계 처분을 각오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앞에 선 내게 상관은 미소 지으며 믿기 힘든 말을 했다.
"상부 지시다. 특별 휴가 다녀와라. 꼭 대상 받고!"
이건 무슨 영문인가. 나는 어리둥절했다. 영창이라는 최악의 처분에서 특별 휴가라는 달콤한 결과라니. 나중에 알게 됐지만 나는 가요제 참가가 어려워졌을 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가요제 담당 PD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젊은 PD는 처음엔 다소 흥분한 듯 보였으나, 이내 침착한 어조로 나를 다독였다.
"원표 씨, 걱정 말고 기다려요. 내가 어떻게든 해결해 볼 테니까."
나는 아직도 그 젊은 PD가 어떤 마법을 부렸는지, 어떤 논리로 그 완고한 권위주의의 벽을 허물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 기적 같은 휴가증 한 장이 나를 다시 무대 위로 이끌었다는 사실뿐이었다.
인생 첫 오케스트라의 선율과 ‘단군’의 해프닝
본선 무대는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웅장했다. 리허설을 위해 무대에 섰을 때, 나의 독창을 받쳐주기 위해 배치된 풀 편성 오케스트라를 보며 나는 압도당했다. 수십 명의 연주자가 오직 내 목소리에 호흡을 맞추기 위해 악기를 조율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경외감을 자아냈다. 내 생애 최고의 반주이자, 가장 무거운 책임감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본선 당일 아침, 또 하나의 어이없는 해프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리허설도 하기 전 그새 친분이 쌓인 담당 PD가 달려와 나를 구석으로 끌고 갔다.
"원표 씨, 큰일 났어요! 내가 미리 생각을 못 했네. 가사를 안 바꾸면 수상이 어려워질 것 같아요!"
이유인즉슨, 내가 부를 노래 ‘전설’의 가사 중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여기 오천 년, 단군의 나라는 천지가 만나는 나라
하늘과 땅이 합쳐져 팔 척의 단군을 낳았으니..
(중략)
단군을 맞아라 주문을 외워라
천 년을 헤어져 지낸들 믿음이야 끊어지리까”
‘단군’이 문제였다. 기독교 방송인 CBS에서 ‘이 나라는 단군에 의해서 만들어진 나라’라는 표현이 심사위원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는 않을 거라는 PD의 세심한 배려였다. 하지만, 당장 가사를 고치는 것은 불가능했고, 그 짧은 시간에 바뀐 가사를 외워 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춘다는 것은 더 말이 되지 않았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PD에게 말했다.
"그냥 가겠습니다. 가사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본 공연의 막이 오르고, 오케스트라의 장엄한 서곡이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감고 '조국과 청춘' 시절의 나를 떠올렸다. 교정의 박수와 함성 속에서 부르던 노래, 그리고 이제는 곧 군복을 벗고 온전한 자유인이 될 나의 노래 첫마디.
"여기 오천 년, 단군의 나라는..."
오케스트라의 선율은 내 목소리를 풍성하게 감싸 안았고,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떨렸지만 진심으로 노래했다. 결과는 동상 수상. 화려한 대상은 아니었지만, 영창의 위협과 금기의 가사를 뚫고 얻어낸 값진 훈장이었다.
다시 시작되는 노래, 청춘의 긴 여정
가요제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보았던 기억이 난다. 대학 입학 후 시작된 나의 노래 인생은 참으로 다이내믹했다 뜨거웠던 거리와 함성으로 가득 찬 캠퍼스, 그리고 방금 내려온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무대까지. 돌이켜보니 내가 부른 모든 노래는 결국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단순히 노래를 부르는 행위를 넘어, 어떤 상황에서도 나 자신을 잃지 않고 더 나은 내일을 꿈꾸겠다는 스스로와의 약속이었다. 영창의 위기 대신 기적 같은 휴가를 얻고, '단군의 나라'를 노래하며 무사히 공연을 마친 이 놀라운 경험들은 앞으로 내게 펼쳐질 삶에 큰 용기가 되어줄 것 같았다. 비록 세상이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더라도, 노래가 있는 한 나는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제 제대를 앞둔 내 마음속에는 '조국과 청춘'이라는 뜨거운 자부심과 함께, '자유'라는 새로운 설렘이 피어나고 있었다. 군대의 문을 나선 뒤 마주할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 알 수 없지만, 나는 두렵지 않았다. 함께 노래하던 사람들이 있었고, 무엇보다 내 손에는 세상을 향해 부를 '노래'라는 가장 소중한 무기가 쥐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청춘은 끝나지 않았다. 아니, 진정한 노래의 전설은 이제 막 그 서막을 올리고 있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