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생활자의 꿈
'조국과 청춘' 그 전율의 이름
‘조국과 청춘’.
묻곤 한다. 내 인생에서 이토록 뜨겁게 타올랐던 시간이 있었을까. 나의 청춘을 다해 노래했던 곳, ‘조국과 청춘’.
아직도 소름 돋도록 생생하게 살아오는 어느 봄날 밤이 있다. 한양대 교정에서 있었던 전대협 출범식 전야제에, 우리는 열기로 터져버릴 것 같은 수만 명의 학우들 앞에서 노래했다. 조국과 청춘이 소개되는 순간, 대지가 무너지는 듯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환호는 마치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가 토해내는 뜨거운 입김 같았다.
무대에 올라가기 전에는 압박감으로 숨쉬기가 어려웠고, 공연 중 내가 혼자 노래하는 부분에서는 가슴이 너무 뛰어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공연을 마치고 무대를 내려와 너무 긴장한 나머지 연습한 만큼 잘하지 못했다고 다들 입을 모아 아쉬워했다. 하지만, 어두운 밤을 환하게 일렁이던 수만의 눈빛과 수만의 입을 모아 부른 노랫소리의 기억은 아직도 그 밤을 떠올리는 나의 심장을 고동치게 한다.
우리는 ‘서총련(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의 공식 노래단으로서 서울 지역의 여러 대학교 노래꾼들로 만들어졌다. 그 시절 노동자 노래패 ‘꽃다지’와 함께 학생을 대표하는 노래패로 수많은 민중가요를 만들어 냈다. 90년대 대학 교정을 거닐었던 사람들이라면 지나가면서라도 한 번쯤은 우리의 노래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누군가의 기억 속에 뜨거운 불꽃으로 남아있는 이름, 나의, 그리고 우리의 조국과 청춘.
지금 보면 다소 투박해 보이는 이름일지 모르나, 그 안에는 시대의 뜨거운 숨결이 맥박치고 있다. 한국의 민중가요는 오늘날의 K-POP이 그러하듯, 세계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독자적인 생명력을 얻으며 발전했다.
그러나 80년대 후반까지 음악의 분위기는 대체로 무겁고 비장했다. 그럴 수밖에 없던 것이 난공불락의 독재 권력은 절망적으로 강했고, 탄압의 벽은 높았으며, 보이지 않는 희생은 일상적이었다. 하지만 위대한 시민들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87년 6월 민주화운동 이후 시민의 승리의 경험은 쌓였고 갔고,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은 점점 더 커졌다. 승리의 환희가 슬픔의 자리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그 찬란한 희망을 담아 90년대 들어 민중가요는 비로소 밝고 경쾌해졌다. 그 물꼬를 튼 선두에 ‘조국과 청춘’이 있었다.
시대의 변주, 광장에서 마주한 닮은 꼴 청춘
최근 나는 불법적인 비상계엄과 탄핵정국으로 들끓던 광장에서 경이로운 광경을 목격했다. 정치와 역사 따윈 관심도 없을 거라 오해했던 젊은 세대들이 무거운 구호대신 아이돌의 응원봉을 들고 나와 춤추고 노래하며 대통령 탄핵을 외치던 장면이었다. 축제처럼 찬란하게 빛나던 그 생경한 풍경 속에서, 그들이 들고 있던 피켓에 적혀 있는 문장을 마주했다. 그리고 나는 그만 목이 메고 말았다.
‘춤추고 노래하며 절망이랑 싸울 거야’
춤과 노래의 신명과 처절한 절망, 두 감정은 한 그릇에 담을 수 없는 극단의 언어다. 맞닿아 있어도 결코 섞이지 않는 물과 기름처럼 경계가 명확해야 맞다. 그러나 광장의 그들은 이런 세상의 관념을 비웃기라도 하듯, 분노와 좌절의 집회 현장을 순식간에 뜨거운 콘서트장으로 바꿔 버렸다. 절망에 정면돌파를 선언한 그들은 함께 끌어올리는 ‘흥’을 통해 모두 하나가 되었다.
어떤 언론은 이런 모습을 ‘비장함을 품은 흥겨움’이라 명명했다. 그곳에 폭력은 없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오늘날 그들이 써 내려가는 가슴 벅찬 서사는 과거 ‘조국과 청춘’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는 사실을.
나의 '조국'은 여전히 '청춘'
내가 활동한 7년 동안 조국과 청춘은 6개의 음반에 총 80여 곡의 노래를 발표했다. 감사하게도 발표하는 음반마다 민중가요를 아끼는 많은 학우들에게 널리 알려지고 불려졌다. 그 노래들이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 민중가요가 지향하는 시대적 의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음악적 형식에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했기 때문일 것이다. 조국과 청춘은 분명 새로운 세대였고 이전과는 다른 방향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어려웠지만 도전했고, 비장했지만 밝았다.
우리는 전국을 다니며 많은 공연을 했다. 거리에서부터 캠퍼스의 노천극장, 그리고 뜨거운 축제의 한복판에서 적게는 수백 명, 많게는 수만 명과 함께 노래로 하나가 되었다. 가는 곳마다 ‘조국과 청춘’이란 이름 앞에 쏟아지던 열광적인 환대는 전율과 같은 감동이었다. 과분했다. 그리고 매 순간 달콤하면서도 두려웠다. 내 생애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뜨거운 환호와 박수를 받게 될 날이 다시 올 수 있을까 하고.
각자의 학교에서 하루의 수업이 끝나면 우리는 어김없이 경희대 운동장 스탠드 한구석, 작은 연습 공간으로 모여들었다. 그곳에서 매일 노래를 만들고 연습했다. 공연을 해서 생기는 수입은 악기를 사고 음반을 만드는데 모두 쓰여 주머니가 가벼웠다. 가끔 저녁 먹을 돈도 없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 삶이 고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 누군가의 관심과 환호만을 갈구했다면 그 길을 끝내 걷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를 움직였던 건 우리가 꿈꾸는 세상에 대한 간절한 열망, 그리고 그것을 얻으려는 우리 손에 쥐어진 가장 아름답고 강한 무기가 ‘노래’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꿈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을 이십 대, 작은 용기를 내어 소중한 청춘을 다해 세상을 노래했던 ‘조국과 청춘’. 누군가는 묻는다. 그토록 뜨거웠던 시절이 지나간 뒤 지금 무엇이 남았느냐고. 나는 대답 대신 미소 지으며 광장의 노래를 듣는다.
나는 안다. 한양대의 밤을 출렁이던 우리의 함성과, 지금 광장을 수놓는 젊은 세대의 응원봉 불빛은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을. 시대의 언어는 달라졌어도, 더 나은 세상을 향해 신명 나게 나아가는 그 유쾌한 열망만은 놀랍도록 닮아 있다는 것을. 그날의 우리처럼, 오늘날 그들도 자신들만의 가장 눈부신 노래로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기에, 나의 '조국'은 여전히 '청춘'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