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 소박하게 은퇴하고 캐나다와 제주도에서 반년씩 살고 있는 파이어족 은퇴자 캐나다홍작가입니다^^
방금 전 줌zoom으로 영어수업을 들었습니다. 캐나다 이민자센터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여러 프로그램 중 하나인데요. 오늘 영어 선생님은 70대 중후반의 친절하고 올바름이 뚝뚝 묻어나는 멋진 여자분입니다. 이분도 수십 년 전에 유럽에서 캐나다로 온 이민자인데, 와서 몇십 년간 교사 생활을 하다가 지금은 이민자들을 위해 지식 나눔 봉사를 하는 중이라고 하네요. 본 목적은 IELTS를 대비하는 수업이지만, 코로나 시즌이라 당장은 시험이 없다 보니 각자의 일상이나 캐나다 문화 얘기도 많이 나누며 좀 자유롭게 진행되는 수업이지요. 그 덕에 빡센 영어공부는 영 하기 싫은 사십 대 불량학생인 저도 아주 재밌게 참여하고 있답니다.
캐나다에서는 노년에도 자기 커리어를 이어가는 이런 분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북미 쪽은 한국과 달리 정년은퇴 나이가 따로 없다네요. 그래선지 주변에서도 칠팔십 대에도 하던 일을 계속 이어가는 분들이 많이 보입니다. 새로운 분야에서 소일거리 삼아 일하거나, 제 영어 선생님처럼 봉사를 하는 분들도 많고요.
여기는 캐나다에서 제일 작은 주라서 다운타운에 동네 영어 학원이 딱 하나 있는데요. 거기에서 안내 접수받는 분도 한 여든쯤 돼 보이는 할머니입니다. 이민 초기에 그 학원에 1:1 단기 수업을 신청하러 갔다가 만났지요. 인자한 미소를 띤 채로 한 50~100타쯤 될 것 같은 양손 검지 손가락 독수리 타법으로 천천히 접수증 타이핑하는 모습에 전 그만 홀딱 반해버렸답니다.
'현타 온다'는 표현이 이럴 때 쓰이는 건가요? 뭔가 제 뒤통수를 탁- 치면서 깨닫게 되는 그런 순간이었거든요. '아 이래도 되는... 거였어? 되는 거였구나...!' 이 생각이 그 뒤로도 한참 머리에 남아서 이것저것 더 생각해 보게 되더군요.
전 이민 전에 서울에서 사십 년 가까이 살았고, 그중 절반인 이삼십 대 내내를 빠르게 돌아가는 입시학원 대표강사로 속도전을 내며 지냈습니다. 실적주의, 결과주의, 성과주의가 몸과 마음에 푹푹 밴 채 그런 서울스러움이 그냥 당연한 세상살이 방식인 줄 알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 50타 할머니 접수원을 보는 순간, 그간 정석이라 굳게 믿던 원칙이 제 속에서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러면서 '아, 여긴 이래도 되는구나! 이런 데서 살고 싶다! 이런 데서 늙고 싶다!' 이 생각이 간절해지더라고요.
제가 다니는 마을 여성 당구클럽에는 이십 대부터 칠십 대까지 다양한 나이대의 동네 여성들이 모여 당구 대결도 하고 친목도모도 하는데요, 여기 랭킹 1위가 칠십 대인 완다, 2위가 육십 대인 크리스입니다. 얼마나 잘들 치는지... 제가 매번 여러 수를 배우고 있지요. 당구만 잘 치는 게 아니라 성격도 쿨하고 리더십도 있고 또 어린(?) 저희들에게 칭찬과 격려도 무한하게 해주는 멋진 분들입니다. 꼰대답지 않고 지혜롭게 말하고, 자식 손주 얘기가 아닌 자기 얘기를 즐겁게 할 줄 아는 모습도 편하고 좋지요. 존칭, 존댓말이 없이 서로 이름 부르는 언어문화라서 나이로 인한 부담스럼 격식이 더 없는 것도 같습니다.
이 모임의 언니들처럼 캐나다는 노인들이 대부분 잘 교육받고 소득도 괜찮고 다양한 문화생활을 즐기며 사는 편입니다. 그러다 보니 동네 여러 취미나 교양모임에도 청년, 중년, 노년이 다양하게 만나 서로 친구처럼 교류할 기회도 많습니다. 자신감있고 온화하고 개성적인 왕언니들을 보면서 '저런 모습 괜찮은데?' 싶은 순간들도 그만큼 많이 눈에 띄고요.
꼭 위인전에 나올 것 같은 대단한 사람들만 롤 모델이 되는 건 아닌가 봅니다. 요즘 제 눈에는 모임마다 여럿씩 보이는 평범한 왕언니들이 다 닮고 싶은 면면이 있는 롤 모델로 보입니다. 물론 그 사람 인생 전반의 모든 스토리까지야 알 수 없지만, 그저 단편적인 면면으로도 여유롭고 안정적이고 교양 있는 모습들이 느껴지니 그런 순간순간을 제 마음속에 캡처해 두는 것이지요. 이렇게 캡처한 언니들의 면면이 모이다 보면 제 노년의 일부도 그런 모습들을 닮아 있을 것 같습니다.
멋진 할머니들이 많은 곳에 살고 있습니다.
든든하고 따듯하고 흐뭇하네요.
지금 중년의 제 모습, 우리 모습들도 또 청년인 누군가에겐 롤 모델이 되고 있겠지요?
중년의 내가 성격 비슷한 누군가에게, 내 주변의 멋진 왕언니들이 나에게롤 모델이 되어주는 아주 느슨하고본인은 알아차리지 못할 이런 연대도 참 재밌고 기분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