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직후 1년간은 저 물음에 이 대답이 툭 튀어나왔다. 답하며 장난스레 귀차니즘에 빠진 표정으로 씩 웃어주기까지 했으니, ‘쟤가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먹고 자고 싸기만 하나 보다’라고 생각했을 듯...
한 1년을 저리 답하다 보니 이상하단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은퇴 뒤에 많이 쉬고 많이 놀기도 했지만, 여러 가지를 배우고 이룬 것도 있고, 나는 여전히 잘 지내고 행복한데 왜 아무것도 한 게 없다는 말부터 튀어나오는 걸까?'
정년퇴직하고 나서 허무함에 빠지는 노인들 얘기를 TV로 본 적이 있다. 은퇴 노인들 중에는 자기가 원하는 길을 찾지 못한 채로 위축되고 불안해하며 살아가는 안타까운 경우가 꽤 있었다. 자아 찾기나 취미 생활 등에 신경 쓰며 살 겨를이 없었던 한국의 노인 세대였기에 특히 그랬을 듯하다.
그런데 나는 아무것도 안 하고 불안에 떠는 상황이 아니었다. 은퇴 후 그간 바빠서 하고 싶어도 못 하던 리스트들을 조금씩 해 나가던 중이었다. 생판 다른 나라로 이민 가고, 영어 배우고, 그림 그리고, 춤 배우고, 규칙적으로 운동하고, 책도 출판하고, 드라이브도 자주 다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득문득 ‘아무것도 안 하는 거 같다’, ‘내 인생이 축소된 것 같다’는 심정이 들었다. 편한 일상 중에도 무언가 찜찜하게 불편한 기분이 남아 있었다.
이유가 뭘지 더 생각해 봤다. 결론은,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 워커홀릭 조장하는 분위기에 오래 절여진 탓이 커서였다.
뭘 하다가도, '내가 이 정도 시간과 에너지를 들이면 얼마의 수입이 나왔었는데...'라는 생각에 그 작업의 가치가 낮아 보였다. 당장 돈벌이와 직결되지 않는 일들도 나를 행복하게 하는 가치가 있는데 그 무게를 간과했던 거다.
뭘 안 하고 있는 순간에는 '이렇게 가만히 있다가 후퇴하는 거 아닌가' 싶은 불안감에 빠졌다. 워커홀릭 로봇처럼만 살아왔기에 느리고 여유롭게 진행되는 일들을 즐기지 못하고 그 속도가 어색하고 불안했던 거다.
사는 방식은 변했지만 삶을 보는 기준은 하루아침에 바뀌기 힘들다. 그러다 보니 일종의 과도기적 혼란을 겪었던 것이다.
이런 과도기, 혼란기를 잘 넘기려면 '은퇴 전의 기준과는 다른 새로운 기준'으로 내 삶과 일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당장 수익으로 이어지지 않는 활동도 내 인생에 필요하고 활력을 주는 가치가 있다는 걸 이해해야 한다. 빡빡한 일정 없는 한가함 속에서 사색하고 성찰하면서 내 정신도 쉬고 그만큼 성장할 수도 있다는 점도 이해해야 한다.
이 새로운 가치들을 깨닫고 은퇴에 적응하는 데에 한 1년쯤 걸렸다. 은퇴 뒤 느려진 삶에 대한 과장된 불안함을 벗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은퇴 전 기준을 버리고 1년을 다시 돌아봤다. 느리고 소소한 일들의 무게와 가치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매일 요리해 먹고 치우고 운동하고 씻고 가끔 빨래 청소도 하며 내 자신과 일상을 항상 관리하고 있다. 춤추고 그림 그리고 당구 치고 악기도 연주하면서 창의적인 취미 생활도 즐기고 있다. 수영장 다니고 골프 배우는 것은 하다 관뒀지만 그래도 오래 미루던 일을 시도해봤다는 데에 의의를 두자.
바쁠 땐 못하던 다독을 하며 더 배우고 있고, 성찰과 사색으로 더 성숙해지는 중이다. 이민 생활에 필요한 영어 공부도 하며 실력이 나아지고 있다. 비록 수험생처럼 열심히는 안 하고 빼먹는 날도 많지만...
은퇴 후 새 동네에서도 마음 꽤 잘 맞는 절친들을 사귀고 연애도 하며 사교생활도 잘하고 있다. 날씨 좋으면 드라이브 나가거나 지인들과 소풍도 다니며 자연도 즐기며 산다. 큰눈 오고 비 내리는 날은 맛있는 음식 해서 드라마 정주행하며 집순이 모드의 안락함도 누릴 줄 알게 됐다.
부동산 임대 사업 관리와 각종 세금 및 수입 지출 관리 등을 하며 검소하게나마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도록 하고 있다. 투자공부도 열심히 하는 중이다. 웬만한 가구도 직접 조립하고 비데 설치에 수도 교체, 차 배터리 충전까지 내 손으로 할 줄 알게 되었다. 덜 사고 절약하면서 쓰레기 배출도 절반 이하로 줄였다.
죽-써놓고 보니 잘한 일도 있고, 그럭저럭 한 일도 있고, 중도 포기한 일도 있지만 종합적으로는 만족스럽게 느껴졌다.
저 중에서 돈벌이에 직결되는 것은 임대 사업 관리 하나뿐이고, 빠르게 성과를 올린 일은 하나도 없다. 은퇴 전의 기준이었다면 이런 생활이 ‘매우 불만족’이었을 거다. 하지만 생각을 바꾸니 이 정도도 꽤 기특하게도 느껴졌다. 일상, 취미, 건강, 사색, 배움에 관한 여러 일들을 두루두루 챙기며 무탈하게 잘 보내고 생각도 깊어지며 성장한 한 해가 아닌가!
다이내믹한 활동들로 '제2의 전성기를 누리는구나' 소리를 들어야만 은퇴 생활을 잘하고 있는 게 아니다. 빨리빨리 성과주의식 한국물, 남들 기준을 눈치보며 사는 한국물을 빼고 보자. 그러면 내가 좋아하는 길에서 나만의 속도로 잘 살아가고 있는 내가 보이게 된다.
이제 ‘아무것도 안 하는 거 같아’ 같은 대답은 하지 않게 됐다. ‘잘 먹고 잘 쉬고 즐기고 조금씩 배우고 성장하며 대체로 편하고 행복하게 지내고 있어’라는 조금 길어진 문장이 맞는 대답인 걸 알게 됐으니까.
좀 느리면 어떤가, 은퇴도 했으니 이젠 내 속도 대로 살면 된다. (픽사베이 무료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