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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홍 Jun 18. 2020

가자미를 먹는 두 가지 방법

구워도 그만 삭혀도 그만

어렸을 때는 외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았어서 토요일이면 학교를 마치고 할머니댁에 가곤 했다. 평범한 주말 점심일 뿐이었을지도 모르지만 할머니가 차려주셨던 따뜻하고 맛있는 밥을 푸지게 먹으며 행복해하던 추억이 있다. 할머니는 텔레비전 요리프로에 나온 레시피를 다음날 똑같이 만들어 식탁위에 올리는 요리 천재였고 할머니가 차려준 집밥은 밥먹는 것을 안좋아하던 내 입가에도 침이 고이게 했다. 그리고 밥을 먹은 뒤에는 늘 사과랑 배를 깎아주셨다. 나는 그 중에서도 단 맛이 강한 꿀사과를 가장 좋아했다. 그냥 사과를 먹다가 달콤한 사과를 먹으니 그 단맛에 금세 중독되었다. 꿀사과는 하필 이름에도 '꿀'자가 들어가서는 꿀사과, 하고 발음해보기만 해도 얼마나 예쁜 느낌이었는지. 여러모로 한눈에 반해서 한동안 꿀사과만 찾았다. 사과를 먹을때 '이건 꿀사과인가...' 하고 생각해보고 먹고, 내가 기대한 것만큼 달지 않으면 조금 실망하기도 했다. 하루는 그런 속마음이 입 밖으로 나왔던 모양인지 할머니가 깎아준 사과가 꿀사과가 아니라고 투덜대는 나에게 할머니가 일러주었다. "원래 있지, 사과는 신게 매력이야."








할머니께서 편찮아지시면서 당신이 해 주시던 음식을 다시는 못 보게 되어버렸고, 할머니가 밥 먹고 깎아주시던 사과도 못 먹게 됐다. 사실 사과야 뭔들 어떻단 말인가. 세상에 사과는 많고 할머니가 나한테 주시던 사과도 늘 같은 사과가 아니었는걸. 어느 날은 우리 할머니 말대로 매력적으로 셔서 맛있고 어떤 날은 달콤해서 맛있고. 하루는 아삭아삭한게 입 안에서 상큼함이 톡톡 터지고 이틀은 베어 물면 파운드 케이크마냥 이 사이로 부드럽게 퍼지면서 사르르 녹아버리고. 할머니 집에서 푸릇한 아오리사과를 처음 먹었을 때는 꼭 외국에서 온 멋진 친구를 소개받는 느낌이었다. 할머니한텐 말 한적 없지만, 솔직히 어떤 날은 평소보다 살짝 맛이 없는 사과이기도 했고. 하지만 꼭 우리 외할머니가, 그것도 꼭 밥을 먹고 나서 깎아주시는 사과에서만 나는 맛이 있다. 그 맛이 그리워서 가끔 집앞 편의점에 나가 천 오백원짜리 세척사과를 사다가 봉지를 뜯어 씹어먹어봐도 절대 그 맛이 나지 않는다. 할머니 집밥을 먹고 나서 먹는게 아니라 그런가, 할머니 집밥 냄새를 맡으면서 먹은게 아니라서 그런가.





그렇게 할머니네 집밥 맛을 잊어버리고 마음 속에서만 떠올린지 10여년이 지났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생전 들어보지도 못했던 가자미식해라는 음식을 꺼냈다. 가자미... 시캐? 식해. 식혜? 이 빨간게 식혜야? 그게 아니고 식, 해. 꼬들꼬들하니 맛있어. 엄마의 엄마의 고향 음식. 한 젓가락 떠서 먹어보니 할머니가 늘 해 주시던 가자미 구이와는 너무 다른 맛이 났다. 하얗고 말랑말랑하고 고소하게 입안에서 부서지는 구운 가자미가 아니라, 차게 식은데다가 뽀얀 빛은 온데간데 없고 어딘지 투명하고 단단해보이는 살이 못내 낯설었다. 말해주지 않았다면 이 생선이 바로 그 가자미인줄도 몰랐을 것이다. 너 내가 알던 그 애 맞니. 상냥하고 서글서글하고 누구든 두 팔 벌려 안아줄 것만 같은 포근한 가자미 맞냐구. 왜 그렇게 새침하고 날카롭게 뻘건 양념을 두르고 시크하게 흰 종지에 담겨져 있는건데. 가자미식해는 어릴 때의 나라면 ‘어른 음식’ 서랍에 넣어두고 안 먹었을 그런 비주얼과 맛이었다. 그런데 양념을 해서 장독대에 담아 숙성시킨 가자미에 배인 세월의 맛은 구운 가자미만큼이나 맛있고 인상적이었다. 함경도에서 많이 먹던 음식이라기에 어디가서 먹을 수 있나 찾아봤더니 속초 아바이마을에 가면 맛있는 가자미식해를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이 지역에는 한국전쟁때 월남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기 때문이라나. 그래, 할머니가 어릴 때 고향에서 이걸 해먹고 지냈다는거지. 맛있게 먹었던 음식인지, 아니면 그냥 자주 해 먹던 음식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고향을 떠나서도 계속 만들어 먹었다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 아닐까. 할머니에게 가자미식해에 대해서 직접 여쭤볼 수는 없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내 맘대로 할머니의 어린시절 식도락에 대해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볼 수 있었다. 춘 겨울날 밥을 한 공기를 퍼서 가자미식해 한 접시, 명태순대 한 접시씩 놓고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수저를 놀리는 아이의 모습이 그려진다. 엄마에게 혹시 할머니가 해주던 가자미식해 레시피에 대해 들은 적이 있는지 물었는데 “글쎄, 좁쌀을 잘 해야 한다던데.” 정도의 답만 돌아왔다. 잘, 좁쌀을 잘... 잘 어떻게요. 할머니 손을 붙잡고 탈탈 털면서 어떻게 하는지 알려달라고 떼쓰고 싶어졌다.





이제 어른이 되어서 이런 어른냄새 물씬 나는 음식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데요. 할머니가 직접 해 주시기만 하면 제가 감히 술 한잔 올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어느새 당신의 세월이 서린 음식을 같이 둘러앉아 먹을 수 있을 만큼 컸는데  이제는 할머니와 더는 대화를 나눌 수도, 맛있는 것을 나누어 먹을 수도, 같이 산책을 나갈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 그 때 못 먹던 것을 이제는 먹을 수 있게 되었고 그 때 몰랐던 것을 하나둘 알아가고 있는데 정작 할머니가 품고 살아온 역사와 시간이 서린 음식을 만나볼 수가 없다니. 할머니는 나를 기다려주려 하신 것 같은데 세월이 할머니를 자꾸만 채근했나보다. 매번 다른 이름으로 나를 부르시는 지금의 할머니가 나를 어떻게 기억하고 계신지도 알 길이 없고 내가 기억하고 있는 할머니와의 추억들도 점점 흐릿해져 간다. 시간의 흐름은 어느 누구의 과오도 아니건만 이 순간만큼은 무엇인지도 모를 대상을 원망하고 싶어진다.






우리 가는 길에 꼭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끝까지 손 흔들며 웃어주시던 우리 할머니. 할머니가 내게 알려줬던 것들은 남보기에 그렇게 거창한 것들이 아니었다. 네가 싫어하는 신 사과는 사실 시기 때문에 매력이 있어. 이 꽃은 라일락이라고 하는데 아주 좋은 향기가 나. 잠자리는 여름에 날고 가을에 앉아. 그러나 할머니는 나에게 꽃향기와 고소한 음식 냄새와 여름 잠자리의 날갯짓으로 이루어진 멋진 세계를 열어주었으면서 정작 내가 당신이 알던 세계에 발을 내딛기도 전에 저만치 멀어져버렸다. 난 그저 할머니가 내게 알려줬던 아름다운 것들을 손에 쥐고서 당신의 눈으로 보는 세상이 어땠을지 감히 상상해볼 수 있을 뿐이다. 할머니가 직접 해 주시는 가자미식해는 어떤 맛일까. 할머니가 알려주는 비법으로 가자미를 구웠으면 어떤 맛이었을까. 명절이면 해 주시던 닭요리가 내 손을 거쳤다면 어떻게 탄생했을까. 할머니처럼 신사과에 숨어있는 매력을 발견하는 반짝이는 눈은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는걸까. 공장에서 포장되어 비닐에 싸여 나온 이 깍쟁이 같은 세척사과에도 내가 모르는 어떤 매력이 숨어있을지 모르는데. 할머니의 낮고 단단한 목소리와 이북 말씨도, 낮잠 잘 때 머리 쓰다듬어 주던 조그만 손길도, 해주시던 음식 냄새도, 외람되오나 귀엽고 또 가끔은 너무 짓궂어서 밉기도 했던 개구진 장난들 없이도 징그럽게 잘만 커버린 지금 내 삶에서 또 어떤 톡쏘는 매력을 발견할 수 있을까. 





가끔은 할머니가 나타나서 살짝만 알려주면 좋겠다. 아아 할머니, 이딴 지루하고 고루한 일상에 대고 투정하는 저에게도 '인생은 고루한게 매력이야.' '일상은 지루한게 매력이야.'라고 말하면서 웃어주실건가요. 아마 우리 할머니라면 헛소리하지 말고 밥이나 먹고 하던거나 잘 하라며 핀잔을 주실 것 같다. 그리고선 사과나 엑설런트, 투게더 아이스크림, 웨더스 오리지날 중 하나를 먹으라고 주시겠지. 그리고 나가 놀자며 내 손을 잡아끌고 문밖을 나서서 걸으며 같이 라일락 향기를 맡겠지. 손을 잡고 같이 걷다가 다홍색 꽈리 열매를 발견하면 입에 넣고 꽥꽥 불어주시겠지. 그런 기억 몇 개쯤 주머니에 넣고 굴리면서 가끔 손에 잡히는걸 하나 꺼내다 들여다볼 수 있는 일상이면 그래도 꽤 괜찮은 것 같다. 이제는 할머니랑 몸도 멀어져 있고 마음도 어쩌면 더이상 가까워지지는 못할 것만 같다. 하지만 일찍 찾아온 여름과 함께 헐레벌떡 피어난 라일락을 보면서 할머니를 떠올리듯이 뉘엿뉘엿 저물어 더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남겨진 것들, 남겨졌다고 믿고 싶은 것들을 언제든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어 본다. 그것이 지금 어떤 형태를 띠고 있든 분명히 알아볼 수 있으리라 믿는다. 할머니가 해 주시는 구운 가자미를 더는 먹을수 없게 됐더라도 할머니 생각을 하면서 엄마와 가자미식해를 나누어 먹을 수는 있겠지. 그 때 우리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식탁위에 떠오를 그 무언가를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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