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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홍 Jul 10. 2020

나를 허락하는 내 공간

실례합니다, 내 집에 들어가 발 뻗어도 될까요?

어느 날 침대에 누워 뒹굴다 문득 아, 이곳이 정말 내 집이구나 싶었다. 새 집으로 이사온지 반년만에 처음으로 잘 밤도 아닌데 침대에 누워서 숨겨뒀던 게으름을 촤르륵 펼쳐보았던 순간이다. 낯설고 온통 하얀 이 공간에게서 뒹굴뒹굴, 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는데 반년이 걸렸다.








남의 집이라 느껴지는 곳을 매일 잘 쓸고 닦으며 가꿔줬다. 아무도 먹이지 않는 눈칫밥을 나 혼자 주워 먹으며 버틴 지 6개월이 지났다. 남의 집에 쥐도 새도 모르게 들어와 스며들어 사는 객처럼, 내 집처럼 지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고 불편하게 지내오던 차였다. 결국 이 곳도 오래 머물 곳은 못 될 거야. 약속한 시간이 끝나면 다시 새 보금자리를 찾아야 해. 여기서 언제까지고 살 수는 없어. 나 말고 다들 여기에 아주 오래 살았네, 하지만 내가 이 동네에 정을 붙일라 치면 다시 새 동네로 떠나야 할 텐데. 언젠가 떠날 곳이라고 생각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이 공간을 더 열심히 다듬고 빛냈다. 잠깐이나마 머물면서도 이 시간을 후회 없이 보낼 수 있도록 하자, 좀 모자라더라도 한결같은 모습을 유지할 수 있게 가꾸고 내 일상도 그렇게 멀끔하게 지켜내자,라고 다짐하면서 작은 일상이라도 성실하게 지내보려고 했다.





혼자 사는 사람은 집안에서 여러 가지 역할을 도맡아 해야 하게 마련이다. 서류상의 입주자, 각종 집기들과 시설들의 상태를 살피는 관리자, 낮엔 자릴 비우고 밤에만 들어와 잠을 청하는 숙박객, 매 끼니를 스스로에게 챙겨주는 주방장, 주기적으로 곳곳에 쌓이는 먼지를 털어주는 미화원, 손이 닿는 곳마다 예쁜 뭔가를 채워 넣는 인테리어 디자이너, 밤이 늦으면 소등하라 채근하는 사감. 그 가운데 어느 역할에 더 큰 비중을 둘 지에 따라 집주인이 자기 공간과 맺는 관계가 결정된다는 생각을 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집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한 사람이 여러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면 자신이 어떤 역할에 더 부합하는지 생각해볼 수 있다. 나는 집에서 주로 무엇을 하는가. 이 집을 온전한 휴식의 공간으로 보는가? 내 집을 스몰 오피스 홈 오피스로 사용하고 있는가? 청소하고 관리해야 하는 공간으로 보는가? 나는 이 집의 관리자인가, 이 구역의 요리사인가, 머물며 쉬어가는 손님인가, 늘 어딘가에 등을 대고 배를 긁으며 굴러다니고 있는 백수 삼촌인가.





그 가운데 내가 최근까지 상당한 비중을 두고 있는 역할은 단연 미화원이었다. 이 집에 들어오면서 마음속으로 세워뒀던 대원칙 가운데 하나는 일주일에 한 번은 대청소를 하자는 것이었다. 눈에 띄는 곳은 한 번씩 반드시 닦는다. 흰 먼지가 검은 먼지가 되어 한데 뭉쳐 몰려다니는 모습을 두고 보지 못하는 성격 탓이다. 먼지들이 모여 먼지구름을 만들면서 데굴데굴 굴러다니기 전에 없애야 속이 시원하다. 집안 어디든 일주일에 꼭 한 번 이상은 손을 대서 반짝반짝 빛냈다. 그런데 웬걸, 지난주에 화장실 청소를 못 했다. 주말에 시간이 안 났고, 청소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에는 다른 중요한 할 일들이 쌓여 있었고, 내겐 지금 청소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것들이 있었을, 테고... 온갖 핑계를 대 보지만 사실 그 변명들 뒤에 살짝 숨어서 게으름이 주는 달콤함을 즐겼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가장 열심히 수행하던 역할인 미화원은 사실 내가 그렇게 원하던 역할은 아니었다. 규칙적으로 자주 청소하는 것은 시간과 에너지를 꽤 잡아먹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최소한의 인간적인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별수 없이 수행해야 하기에 군말 없이 한다. 청소 후에 새 집에 이사 온 듯한 개운한 느낌을 매우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집 안에까지 일거리를 끌고 들어오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집이 아니면 잔무를 처리할 공간도 없고 온갖 중요한 문서들을 집이 아니면 둘 곳도 없어서 방 한편에 작은 사무실을 만들어 둘 수밖에 없었다. 언제든 필요한 일을 할 수 있지만, 잠드는 순간에도 좀 전까지 손 안에서 굴리던 일들에 골몰하는 날들이 많았다. 종종 나는 그냥 이 집에서 뒹구는 백수 삼촌이고 싶었다.





백수 삼촌은 맘이 편하다. 언제 빨았는지도 모르는 목이 늘어난 흰 티를 입고 고무줄이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해진 추리닝 바지를 엉덩이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치고선 까치집 머리를 탈탈 털며 일어난다. 티셔츠의 늘어난 목 부근만큼이나 늘어진 백수 삼촌의 오전 시간은 그가 쏟아내는 하품과 함께 순식간에 사그라든다. 아마 전날 밤 자기 전에 마신 맥주 거품이 그렇게 스러졌던 것만 같다. 어딘지 혀 끝이 아린 눈칫밥을 배부르게 먹고 나면 초록색 페인트가 칠해진 옥상에 올라가 파릇하게 올라오는 상추와 고추들을 바라보면서 담배를 한 대 피운다. 청소도, 빨래도, 사무실도 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머리가 두 개는 들어갈 것처럼 늘어진 티셔츠의 목 만큼의 공간이 그에게 허락된다. 마음대로 부풀었다가 사라지는 맥주 거품이 허락된다. 밥 먹고 담배 피우는 삼 분의 시간이 그에게 허락된다. 어디부터가 풀이고 어디부터가 바닥인지 구분이 안 되는 제멋대로 칠해진 초록 페인트 바닥이 그에게 허락된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몰라도 아무렴 어때,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도 아닌데. 누구도 판단할 수 없는 그의 머릿속과 마음속 모양새가 허락된다. 그 누구도 삼촌의 하얀 티셔츠에 배인 누런 땀자국을 나무랄 수 없다. 누구나 그런 땀자국 하나쯤은 자기 일상에 묻히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옷장 안에 크린토피아에서 드라이크리닝 하고선 빳빳하게 다림질한 흰 셔츠만 가득할 수는 없다. 대신 옷장 한켠에는 아무렇게나 늘어난 유행이 지난 패턴이 빼곡한 티셔츠 하나쯤 뒹굴게 마련이다. 내 안의 미화원도, 직장인도, 요리사도 그 정도는 허락할 수 있다.





해지고 색이 바래서 잠옷이 되어버린 티셔츠 말고 또 무엇을 스스로에게 허락할 수 있을까. 어쩌면 내가 이 집에, 이 공간에 들어오면서 체결해야 했던 계약의 첫 번째 조항은 이거였을지도 모른다. “내 집에선 가능한 한, 편안하게 쉴 것. 충분히 휴식한 뒤에 그다음 조항들을 수행할 것.” 내가 수행해야 하는 다른 역할들은 그다음 조항에 차근차근 적어 내려 가도 괜찮았던 것이다. 계약서를 우선순위에 따라서 작성한다면, 내가 이 공간과 맺는 관계에 대한 나만의 작은 계약서의 최우선 순위는 적어도 이 공간에서만큼은 뒹굴고 배 긁고 퍼져 있을 수 있는 권한이다. 굴러다니는 먼지를 열심히 치우기 전에 내가 먼저 그 먼지들마냥 굴러다닐 수 있어야 한다. 집은 그런 곳이니까. 구르는 먼지들에 신경질을 내며 열심히 쓰레기통으로 밀어 넣다가는 내 안에서 굴러다니던 백수 삼촌이 먼저 쓰레기통으로 쫓겨날지도 모른다. 백수 삼촌에게 너무 잔소리를 하지 말자. 그를 잘 먹이고 입히고 재우자. 그럼 언젠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일어나 쓰레빠를 끌고 나가 마당을 쓸지도 모른다. 비질을 마치고 나면 강아지에게 밥을 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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