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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홍 Aug 26. 2020

자기 의심의 병리학

나는 의심한다 고로 존재한다

가장 최근 참가했던 집단상담에서 내 닉네임은 ‘집순이’였다.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하는 데다가 집에서 할 수 있는 즐거운 활동들을 많이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늘 바쁘게 나다니는 일상에 치여 나만의 공간에서 누워서 쉬는 시간이 절실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지금은 이런 내 기호와 관계없이 타의에 의해 어디에도 나가지 못하고 집에 갇혀있다. 갇혀있다시피 생활하는 와중에 어쩌면 내가 코로나 무증상 감염자일지도 모른다는 극단적인 생각이 든다. 혹은 집 밖을 나선 아주 찰나에 지금 내 어깨를 거의 닿을 듯 스쳐 지나간 저 마스크 너머에 바이러스가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의심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의심하는 마음은 어떤 측면에서는 내 취약함을 견디지 못하고 남을 공격하는 마음이라 했다. 내 마음속의 나약함과 공포가 모습을 바꿔 남을 향한 칼날이 되는 것이라고도 했다. 이 공격은 방어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감염병을 상대로 한 공격은 무의미한 데다, 그 감염병의 숙주인 죄 없는 사람들을 공격하는 것 또한 그리 의미 있는 행동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무의미해 보이는 공격이라도 하고 싶어 진다면 그 에너지는 어딘가에서 터져 나오게 마련이다.









병에 걸렸을지도 모르는 옆사람을 의심하던 칼날은 내게 돌아와서 나를 의심한다. 나의 건강성을 의심한다. 데카르트는 가만히 앉아 골똘히 생각하는 한 사람은 세상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지만 그 순간 생각하고 있는 스스로의 존재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런데 생각하면 할수록 자신의 존재만은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 사고실험과는 달리 지금의 나는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내 존재가 끊임없이 의심스러워지는 경험을 하고 있다. 이 시국에서 내 존재감은 첫째, 코로나에 걸리지 않았거나 둘째, 코로나에 걸렸음을 알고 조치를 취하거나 둘 중 하나에 해당될 때에만 의미를 갖고 정당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내 몸의 상태를 알아차리고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알아차림을 넘어선 의심을 하고 있는 그대로의 내 건강함에 대해서 불안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장애를 진단하는 것은 어렵다. 정신장애 진단은 수많은 케이스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통계 편람을 따르면 되지만 최종적으로 진단을 내릴지 말지에 대한 판단은 다년간의 임상 경험을 포함한 고도의 훈련을 거친 전문가 집단에게 맡겨진다. 그런데 지금 시국은 온 국민이 스스로의 건강성에 대한 자가진단을 내릴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자가진단의 필요성에 비해 몇 개월간 매일같이 쏟아졌던 기사들 속에서 자가진단을 위해 필요한 증상들은 그리 활발히 공유되지 않았다. 내 몸이 어떤 상태일 때 병에 걸렸다고 할 수 있을지가 확실하지 않고, 평소와 같은 상태가 이대로 괜찮은 것일지 계속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몸과 마음이 어떤 상태일 때 병에 걸렸다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일까. 생전 처음 마주하는 공포와 자기의심 속에서 우리는 시시각각 전문성도, 준거집단도 없이 스스로 건강을 돌아보고 진단해야 하며 이 일은 사람을 피말리게 한다. 흔한 여름 감기도, 계절마다 돌아오는 냉방병도 새로운 전염병으로 둔갑해 우리를 턱 밑에서 위협하고 있다. 이 낯선 공포 아래에서 자신의 존재가 ‘그래도 괜찮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지금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의심을 할 수밖에 없다.






여럿이 한 공간에 있을 때 비말감염을 피하기 위해 마스크를 착용하고 서로를 바이러스로부터 보호하는 것. 최근에 많은 사람들의 행동 양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원칙이 아닐까 싶다. 이것을 지키려다 누군가는 귓가가 찢어지고 손이 부르텄으며 갓난아기들이 태어나서 처음 마주하는 인간의 얼굴에 대한 상이 달라졌다. 지금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여러 사람이 한 공간에 있는 상황 자체를 피해야 할 것만 같다. 내가 나를 다른 사람들로부터 고립시켜야만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내가 다른 사람들과 자신 있게 관계를 맺을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이전처럼 마음 편하게 행복해할 수 있다는 느낌이 점점 옅어지고 있다. 이전에 당연하게 느꼈던 즐거움을 한순간에 빼앗긴 느낌이 들기도 한다. 식욕과 수면욕처럼 친밀감을 느끼고 싶은 욕구도 인간의 사회적 생존에 필수적이라고 했는데 지금 처해 있는 이런 상황 속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사회적인 생존에 위협을 느낄 수 있다.






사람이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 갖는 느낌 중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지각은 많은 부분을 포함한다. 내가 가만히 있는 나를 볼 때 ‘이만하면 문제없지!’라는 느낌을 갖거나 무언가를 하고 있는 나를 볼 때 ‘이만하면 잘하는군!’이라고 느끼고 있다면 그는 긍정적인 자기감을 형성한 사람일 것이다. 만약 스스로의 건강성을 의심하고 자신이 모르는 새에 병에 걸렸거나 그 병을 남에게 퍼뜨리고 다녔다는 느낌을 갖는다면 적어도 이 부분에서는 긍정적인 자기에 대한 느낌을 갖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때 내가 나를 저 바깥에서 찬찬히 살펴본다면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생활하기가 어려워진다. 너는 괜찮지 않을 거야, 너는 아픈 상태일 거야, 너는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사람일 거야, 너는 끊임없이 네 행동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일 거야. 이러한 과정은 크고 작은 차원에서 자기 자신과 멀어지게 만든다. 내가 나와 친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건강한 나’와는 점점 멀어진다. 대신 ‘아플지도 모르는 나’, ‘나도 모르는 새 남에게 폐를 끼칠지도 모르는 나’와는 점점 가까워진다. 이런 모습과 가까워질수록 자기 자신과 좋은 관계를 맺기는 점점 불편해진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해 사회적 생존에 위협을 느낀다지만 그와 동시에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악화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나에게 해를 입힐지도 모르는 타인의 존재에 대해 의심할 때 어쩌면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를 공격하게 될지도 모른다. 코로나에 걸린 사실을 알고도, 혹은 걸렸을지도 모르면서도 경각심 없이 전국을 일주하는 에너지 넘치는 몇몇 사람을 보면 마음속으로 실컷 나무라고 싶어 진다. 그러나 내가 바이러스 보균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면, 내가 남에게 전염병을 퍼뜨릴지도 모른다는 자기의심이 있다면 나는 나 스스로를 의심하고 공격하며 고립시킬 수밖에 없다. 행여나 내 행동이 누군가의 생활양식과 이제 막 세상살이에 첫발을 띤 아기의 시야에 어쩌면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한다면 손 끝 하나라도 함부로 행동할 수가 없게 된다. 이는 상당한 에너지 소모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지금 많은 에너지들이 이런 식으로 외롭게 소비되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남을 의심하고 그들에게 화를 낼 시간에 이렇게 스스로를 의심하고 몸을 사리는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스스로의 건강성과 존재에 대한 의심에 쏟는 에너지는 언젠가 바닥을 드러낼 것이다. 그다음에 그 에너지는 이런 상황을 만든 누군가를 향해 쏟아져 나갈 수밖에 없다. 이 시국 속에서 더는 내 존재의 괜찮음을 의심하고 싶지도 않고, 이런 상황을 만들며 활개 치고 다니는 다른 사람들을 향한 분노도 느끼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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