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소망의 거울을 보통 거울처럼 사용할 수 있단다."
'나는 당신의 얼굴이 아니라 당신이 소망하는 것을 보여준다'라는 이름의 거울은 실제 모습이 아닌 자신이 원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거울은 더 이상 원하는 것이 없는 사람의 모습은 있는 그대로 비춰줄 것이다. 소망의 거울은 소망을 간직하게 만드는 거울일까, 그것을 포기하게 만드는 거울일까. 나는 내 보통 거울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을까. 보통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면서 거기에 비치지 않는 소망을 새로 자아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학창 시절에 꿈꿨던 가장 중요한 소원 중 하나는 전신 거울을 갖는 거였다. 가족들과 살던 집에 있던 가장 큰 거울은 화장실 거울이었어서 옷이 잘 어울리는지 확인하려면 꼭 어딜 딛고 올라가서 상반신만 간신히 비추는 거울 모서리 안으로 점점 길어지는 몸을 어떻게든 욱여넣어야 했기 때문이다. 왜 우리 집엔 전신 거울이 없을까. 그것은 "왜 우리 집엔/나에겐 ~~ 가 없을까." 목록을 이루는 수많은 물건과 상황과 감정들 중 꽤 순위가 높은 것들 중 하나였다. 내 평생 남의 시선을 가장 많이 신경 쓰던 사춘기 시절 내 몸이 어떻게 생겨먹었고 나는 옷을 어떻게 입고 다니며 매년 변하는 키와 얼굴의 비율이 8등신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고는 있는지 샅샅이 살필 수 없다는 것은 상당한 고통을 수반했다. 보이는 내 모습을 완전히 담아낼 수 있는 거울 하나가 없다는 것은 한국에서 나고 자란 10대 여자애가 견디기엔 꽤 강도 높은 불안이었다.
새로 이사 온 집에는 거울이 많다. 너무 많다. 이제 이 거울들에 비치게 될 사람은 나 하나뿐인데도 거울이 지나치게 많다. 현관, 화장실, 세면대, 별도의 화장 공간(그러나 거울은 무시하고 간이 티테이블로 쓰고 있다), 성인이 되고 생긴 전신 거울, 크기가 다른 접경 두 개, 손거울 등 너무 많은 곳에 내 모습을 비추어볼 수 있게 되었다. 집들이를 왔던 친구들은 일단 집안 곳곳에 거울이 많다는 사실에 자기 일처럼 흡족해했다. 그들은 방 이곳 저곳을 신나게 돌아다니면서 여기저기 자기 모습을 비춰보곤 했다. 현관 거울, 합격. 화장대, 합격. 세면대, 합격! 하지만 정작 나는 그 거울들을 십분 활용할 정도로 내 모습을 자주 비춰보지 않는다. 외출 준비를 할 때, 내일 입을 옷을 미리 골라둘 때, 세수하고 스킨로션을 바를 때, 청소할 때 말고는 잘 쳐다보지 않게 된다. 어릴 때 하고 싶었던 것을 이제는 원 없이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오히려 과한 것은 없는 것만 못하게 되어버린 것일까?
좁은 공간이지만 어딜 가나 내 모습이 비치는 게 못내 부담스러웠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 모습을 스스로 어딘가에 비춰보고 바라보고 싶은 순간이 있지만 너무나 선명하게 비치는 인영을 애써 무시하고 싶은 순간이 있게 마련이다. 잘 나가던 모 댄스가수는 거울로 둘러싸인 방에서 자신의 모습을 다각도로 비춰보며 마음을 다잡곤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유행하는 전시에서 내 모습이 여기저기서 비치는 방에 들어가는 경험을 한 적이 있지만 그런 방에 조용히 홀로 들어가 거기 비친 여러 명의 나를 한참 동안 바라보며 정신 수행을 한다고 생각해보면 명치가 답답해진다. 내 어딜 바라봐야 하는 것일까. 일단 거울을 보면 가장 처음 시선이 가는 곳은 눈인데 눈만 바라보기엔 좀 심심하고, 얼굴 이곳저곳으로 눈길을 옮기면 최근의 피부 고민들이 떠올라서 기분이 안 좋아지고, 다른 델 바라보면 마음에 드는 부분과 마음에 안 드는 부분들에 대해서 판단하게 된다. 그리고 사람의 얼굴이 아닌 다른 신체의 일부만을 바라보는 것은 별로 재미가 없기도 하다. 결국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난처해질 것이다. 나 혼자만 있는 공간을 둘러싼 수많은 나의 반영들을 마주하는 것은 낯선 곳에 가서 처음 보는 사람들을 마주치는 것보다 더 생경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나와 내 모습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 걸까? 그런 것은 어디서든 따로 배워본 기억이 없다. 초등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 손거울을 보고 자기 얼굴을 그려보는 시간을 가진 적이 있다. 완전히 발달하지 않은 손가락 소근육은 마찬가지 이유로 한정되었던 시야와 잘 협응하지 못했다. 결국 40분 동안 꾸역꾸역 완성한 내 인생 최초의 자화상은 그야말로 끔찍하게 느껴졌던 기억이 있다. 여덟 살의 내가 거울 속의 내 모습을 어떻게 봤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날 결과가 엉망진창이었을지언정 손가락으로 얼굴을 더듬듯이 내 모습을 자세히 바라보려고 노력했던 것만큼은 뚜렷이 기억한다. 어쩌면 그 날 내가 배운 것은 내가 내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려면 이렇게 갖은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 내가 본 것을 그림으로든 글로든 말이든 표현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때로 내가 본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을지라도 그걸 그대로 간직하고 살아가는 게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은 것이라는 사실일 수도 있다. 그 날 그린 그림을 다시 생각해보면 짧은 시간 동안 서툴게나마 스스로의 모습을 열심히 관찰하고 표현하려 했던 노고를 느낄 수 있다. 세상에 자기 자신만큼 스스로에게 열심인 사람이 또 있을까. 설령 모든 사람이 나를 포기한다고 해도 나만은 나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비록 좌우가 뒤바뀌었을지언정 언제든 스스로를 바라보고 돌봐줄 수 있는 것 아닌가. 내 아이가 자기 자신과 친밀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라는 기도를 올린다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는 나와 가장 친한 친구가 될 수 있으면서 동시에 스스로를 가장 날카롭게 찌르는 천적일 수 있다.
나는 언제쯤 나를 잘 바라보고 관계할 수 있을까. 거울이 많아도 쳐다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자세히 보면 예쁠 줄 알고 한 사람이 자기 자신과 너무 딱 달라붙어 있으면 오히려 나를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다. 내 얼굴을 보려면 거울로부터 삼십 센치는 떨어져 있어야 하는데. 그래야 세수도 하고 화장도 고치고 표정도 살피고 머리도 빗는데. 거울에 코를 박고 있으면 오히려 나는 나를 손톱만큼도 제대로 마주 볼 수 없게 된다. 얼굴 가까이서 입김이 서린 뿌연 거울은 무엇도 깨끗하게 비출 수 없다. 내가 나를 가장 잘 바라볼 수 있는 거리는 어느 정도 일까. 나는 나로부터 얼마만큼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