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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홍 Apr 24. 2020

거울의 방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소망의 거울을 보통 거울처럼 사용할 수 있단다."

'나는 당신의 얼굴이 아니라 당신이 소망하는 것을 보여준다'라는 이름의 거울은 실제 모습이 아닌 자신이 원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거울은 더 이상 원하는 것이 없는 사람의 모습은 있는 그대로 비춰줄 것이다. 소망의 거울은 소망을 간직하게 만드는 거울일까, 그것을 포기하게 만드는 거울일까. 나는 내 보통 거울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을까. 보통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면서 거기에 비치지 않는 소망을 새로 자아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학창 시절에 꿈꿨던 가장 중요한 소원 중 하나는 전신 거울을 갖는 거였다. 가족들과 살던 집에 있던 가장 큰 거울은 화장실 거울이었어서 옷이 잘 어울리는지 확인하려면 꼭 어딜 딛고 올라가서 상반신만 간신히 비추는 거울 모서리 안으로 점점 길어지는 몸을 어떻게든 욱여넣어야 했기 때문이다. 왜 우리 집엔 전신 거울이 없을까. 그것은 "왜 우리 집엔/나에겐 ~~ 가 없을까." 목록을 이루는 수많은 물건과 상황과 감정들 중 꽤 순위가 높은 것들 중 하나였다. 내 평생 남의 시선을 가장 많이 신경 쓰던 사춘기 시절 내 몸이 어떻게 생겨먹었고 나는 옷을 어떻게 입고 다니며 매년 변하는 키와 얼굴의 비율이 8등신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고는 있는지 샅샅이 살필 수 없다는 것은 상당한 고통을 수반했다. 보이는 내 모습을 완전히 담아낼 수 있는 거울 하나가 없다는 것은 한국에서 나고 자란 10대 여자애가 견디기엔 꽤 강도 높은 불안이었다.


 



새로 이사  집에는 거울이 많다. 너무 많다. 이제  거울들에 비치게  사람은  하나뿐인데도 거울이 지나치게 많다. 현관, 화장실, 세면대, 별도의 화장 공간(그러나 거울은 무시하고 간이 티테이블로 쓰고 있다), 성인이 되고 생긴 전신 거울, 크기가 다른 접경  , 손거울  너무 많은 곳에  모습을 비추어볼  있게 되었다. 집들이를 왔던 친구들은 일단 집안 곳곳에 거울이 많다는 사실에 자기 일처럼 흡족해했다. 그들은 방 이곳 저곳을 신나게 돌아다니면서 여기저기 자기 모습을 비춰보곤 했다. 현관 거울, 합격. 화장대, 합격. 세면대, 합격! 하지만 정작 나는  거울들을 십분 활용할 정도로  모습을 자주 비춰보지 않는다. 외출 준비를  , 내일 입을 옷을 미리 골라둘 , 세수하고 스킨로션을 바를 , 청소할  말고는  쳐다보지 않게 된다. 어릴  하고 싶었던 것을 이제는  없이   있게 되었는데 오히려 과한 것은 없는 것만 못하게 되어버린 것일까?





좁은 공간이지만 어딜 가나 내 모습이 비치는 게 못내 부담스러웠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 모습을 스스로 어딘가에 비춰보고 바라보고 싶은 순간이 있지만 너무나 선명하게 비치는 인영을 애써 무시하고 싶은 순간이 있게 마련이다. 잘 나가던 모 댄스가수는 거울로 둘러싸인 방에서 자신의 모습을 다각도로 비춰보며 마음을 다잡곤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유행하는 전시에서 내 모습이 여기저기서 비치는 방에 들어가는 경험을 한 적이 있지만 그런 방에 조용히 홀로 들어가 거기 비친 여러 명의 나를 한참 동안 바라보며 정신 수행을 한다고 생각해보면 명치가 답답해진다. 내 어딜 바라봐야 하는 것일까. 일단 거울을 보면 가장 처음 시선이 가는 곳은 눈인데 눈만 바라보기엔 좀 심심하고, 얼굴 이곳저곳으로 눈길을 옮기면 최근의 피부 고민들이 떠올라서 기분이 안 좋아지고, 다른 델 바라보면 마음에 드는 부분과 마음에 안 드는 부분들에 대해서 판단하게 된다. 그리고 사람의 얼굴이 아닌 다른 신체의 일부만을 바라보는 것은 별로 재미가 없기도 하다. 결국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난처해질 것이다. 나 혼자만 있는 공간을 둘러싼 수많은 나의 반영들을 마주하는 것은 낯선 곳에 가서 처음 보는 사람들을 마주치는 것보다 더 생경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나와 내 모습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 걸까? 그런 것은 어디서든 따로 배워본 기억이 없다. 초등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 손거울을 보고 자기 얼굴을 그려보는 시간을 가진 적이 있다. 완전히 발달하지 않은 손가락 소근육은 마찬가지 이유로 한정되었던 시야와 잘 협응하지 못했다. 결국 40분 동안 꾸역꾸역 완성한 내 인생 최초의 자화상은 그야말로 끔찍하게 느껴졌던 기억이 있다. 여덟 살의 내가 거울 속의 내 모습을 어떻게 봤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날 결과가 엉망진창이었을지언정 손가락으로 얼굴을 더듬듯이 내 모습을 자세히 바라보려고 노력했던 것만큼은 뚜렷이 기억한다. 어쩌면 그 날 내가 배운 것은 내가 내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려면 이렇게 갖은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 내가 본 것을 그림으로든 글로든 말이든 표현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때로 내가 본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을지라도 그걸 그대로 간직하고 살아가는 게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은 것이라는 사실일 수도 있다. 그 날 그린 그림을 다시 생각해보면 짧은 시간 동안 서툴게나마 스스로의 모습을 열심히 관찰하고 표현하려 했던 노고를 느낄 수 있다. 세상에 자기 자신만큼 스스로에게 열심인 사람이 또 있을까. 설령 모든 사람이 나를 포기한다고 해도 나만은 나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비록 좌우가 뒤바뀌었을지언정 언제든 스스로를 바라보고 돌봐줄 수 있는 것 아닌가. 내 아이가 자기 자신과 친밀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라는 기도를 올린다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는 나와 가장 친한 친구가 될 수 있으면서 동시에 스스로를 가장 날카롭게 찌르는 천적일 수 있다.



 


나는 언제쯤 나를 잘 바라보고 관계할 수 있을까. 거울이 많아도 쳐다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자세히 보면 예쁠 줄 알고 한 사람이 자기 자신과 너무 딱 달라붙어 있으면 오히려 나를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다. 내 얼굴을 보려면 거울로부터 삼십 센치는 떨어져 있어야 하는데. 그래야 세수도 하고 화장도 고치고 표정도 살피고 머리도 빗는데. 거울에 코를 박고 있으면 오히려 나는 나를 손톱만큼도 제대로 마주 볼 수 없게 된다. 얼굴 가까이서 입김이 서린 뿌연 거울은 무엇도 깨끗하게 비출 수 없다. 내가 나를 가장 잘 바라볼 수 있는 거리는 어느 정도 일까. 나는 나로부터 얼마만큼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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