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거 안 가져와도 되는데
와줘서 고마워, 라는 말을 선뜻 할 수 있는 관계가 하나라도 있다면 그 순간만큼은 축복이 무엇인지 잠시 느껴볼 수 있는 것 같다. 내 시간과 공간을 내어준다는 것은 내가 그에게 어느 정도의 정성을 기울인다는 뜻이다. 한 톨이라도 번거롭고 귀찮을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나는 당신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나를 생각하고 찾아와준 마음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하지만 나를 향한 강력한 마음과 의도를 마냥 반길수 없는 방문객이 멋대로 찾아오는 것을 늘 만류할 수는 없다. 대문을 열지 않고 불쑥 나타나는 것들은 더욱 그러하다.
적막이 또 찾아왔다. 초인종도 누르지 않고 등장했다. 그런데 이 친구 이번엔 빈 손이 아니다. 뭘 또 잔뜩 싸들고 왔어, 부담스럽다는듯 손사래를 치며 사양해본다. 아니 매번 빈손으로 오기 좀 그래서 이것저것. 별 거 아니니까 가볍게 받아 들어. 시키지도 않았는데 바닥에 자리를 깔고 쇼핑봉투 겸용 종량제봉투에 담긴 것들을 하나씩 풀어놓는다. 너 누워 있는데 배고플까봐 속 시끄러우라고 부담감 한 그릇. 목마를까봐 후회의 눈물 한 병. 취하고 싶을까봐 회피성 수면 한 잠. 자고 일어나서 속 든든하라고 뻐근한 근육피로제 한 박스. 이렇게 네 생각 하는거 나밖에 없지. 그래 이렇게 끔찍하게 내 생각 해 주는거 정말 너 뿐이다.
어떤 적막은 속이 꽉 차 있다. 주문하지 않은 선물들을 풀어놓고 뚱하니 앉아 말이 없다. 이럴거면 왜 왔어. 반갑지 않은 선물들을 손에 억지로 쥐어주고 조용히 눈만 깜빡거리고 앉아있을거면 오지 말지 그랬어. 네 바람대로 속이 시끄러워졌다. 몸이 무거워지고 눈꺼풀이 감겨서 잠에 들지만 더 이상 오지 않는 잠을 쥐어짜 탈탈 털어 더는 나오지 않을 때까지 자고 일어나면 어깨에 적막이 무겁게 올라타 나를 깨운다. 조용하고 무겁게 머리 위에 어깨 위에 올라앉아서 땅바닥에 다시 나를 내리꽂는다. 그런 적막에게 나와 함께한 하루는 아주 알찬 시간이 되었을 것이다. 너는 목표를 이뤘구나. 난 네 덕에 목표를 잃었는데.
세상에 이렇게 많은 종류의 적막들이 있는지 몰랐다. 누군가 내 부름에 응답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상태만이 적막이라고 생각했다. 루쉰의 말대로 누구도 내가 내지르는 소리에 반응하지 않아 "끝없이 거친 벌판에 버려져 있는 것처럼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게 되는 것"만이 적막이라고 생각했다.* 진공 속에서 시끄럽고 격렬하게 울부짖지만 누구의 귓전에도 내 목소리가 가 닿지 못하는 상태로 그가 느꼈을 적막에 대해 상상해본 적이 있다. 하지만 적막은 그것 말고도 다양한 얼굴을 하고 찾아왔다. 걔가 친구들이 많더라고. 우리집에 한 명만 찾아올줄 알았는데 걔 비슷한 애들이 매번 다르게 찾아오더라고. 다들 성격도 모습도 제각각이라 도무지 적응할 틈이 없었다. 지난 번에 왔던 애는 아무것도 못하게 나를 붙잡아 두었는데 이번에 왔던 애는 나를 가만히 두질 않는다. 자꾸 먹기 싫은걸 토할 때까지 먹이고 잠도 안 오는데 재우려 하고 잠에 겨우 들었다 싶으면 도로 깨워서 괴롭히고. 그런데 옆을 진득하게 지키고 있으면서 한 마디 말은 없다.
소리 없는 불청객과 같은 이들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 공간이 이들의 파티룸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데 하나의 적막에 겨우 적응해가면 또다른 얼굴을 한 적막이 하나둘 찾아와 이 공간을 가득 채워버린다. 내가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대신 숨막히는 고요함만이 들어선다. 침묵의 축제에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되어 덩그러니 서 있다 보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적막이 내게 가져온 것들을 꾸역꾸역 삼켜내는 것밖에 없다. 재미없는 술자리에서 마시지도 못하는 술만 연거푸 들이킬 때처럼 그렇게라도 스스로에게 할 일을 쥐어주면 좀 나아질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나라도 찾아서 해보려고 애쓰게 된다. 게워내기 직전까지 그들이 준비한 맛없는 다과를 씹어 삼키다 보면 어느새 나도 말이 없어지고 침묵의 일부가 된다. 침묵을 입 안에서 굴리다보면 나도 적막이 되어가는 것만 같다.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이 불청객들은 우리집 비밀번호가 뭔지 알고 있는 것일까, 대문을 유령처럼 통과해서 들어온 것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것일까. 내가 적막처럼 말을 삼키면 적막과 나를 구분할 수 없게 된다. 그러면 그들은 하나둘 자리를 뜨고 사라진다. 다시 나는 혼자다.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너는 목표를 이뤘구나.
*루쉰, 루쉰 단편 소설집 '외침'(呐喊, 1922) 서문(自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