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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 연길 Aug 13. 2024

불안은 생존을 위한 착각

영화 '퍼펙트 데이즈' 관람평


타인의 평을 보지도 듣지도 않고 쓴 관람일지.

전혀 분석적이지도 않고, 오히려 내 개똥철학과 궤변이 가득 담긴다. 그래서 좋다.

앞으로 영화 감상은 최대한 이런식으로 하고 싶다. 

나무위키나 이동진 유튜브는 글을 쓴 후에 봐도 늦지 않다.



2024년 8월 8일 9시 50분, 라이카시네마 B5석에서 보았다.



 추천을 받았다. SNS 피드에도 후기가 넘쳐났다. 칸 영화제에서 수상한 영화라고 했다. '퍼펙트 데이즈'라는 단어와 포스터의 느낌, 도쿄 청소부라는 주인공의 직업, 그가 중년 남성이라는 점, 스틸컷 몇 장(그 아저씨가 자기전에 혼자 책 보는 장면)을 보고 내용을 지레 짐작했었다. 관찰 예능 같겠구나. 괴짜 루틴쟁이 독신 연예인의 사생활 보는 느낌이려나, 영화제에서는 동양사람의 라이프 스타일이 아직도 신기한가. 분명 영화니까 그 일상에 균열과 갈등이 생기겠지? 일본 영화니까 결국 찝찝한 무력감만 주면서 끝나겠네. 혼자 머릿속으로 꼴값을 떨면서 자리에 착석했다. 다행히도 어줍잖은 예상들이 대부분 빗나갔다. 좋은 영화였다.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었다. 아직도 이 영화가 목에 걸려 소화되지 않는다. 이렇게 써보지 않고서는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코모레비(木漏れ日) : 나뭇잎 사이의 햇살, 그 순간에만 존재하는 것(그 속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을 뜻한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  2004)





 주인공 히라야마는 강박적으로 코모레비를 품으려고 노력하는 인물이다. 내 눈엔 그렇게 보였다. 아침에 문 밖을 나서며 하늘을 향해 씩 웃는 표정이 왠지 애달펐다. 애쓰고 있다고 느껴졌다. 조카에게도 교육하듯 강조하며 말해준다. 그 때만큼은 고집을 꺾지 않는다. 마치 스스로에게 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지금은 지금, 다음은 다음”


 ‘카르페 디엠’이라는 문장이 드디어 왕위를 물려줄 때가 된건가. 코모레비는 한동안 유행처럼 번질 것 같다.무작정 즐기라는 말보다 깊고 세련된 느낌을 준다. 그 뽄새가 요즘 시대와 어울린다. 나는 와비사비(わびさび)도 아직 와사비와 헷갈리는데 걱정이 된다. 뭐 어찌되었든 현재가 제일 중요하다는 말, 의심할 여지 없이 좋은 말인 건 맞다. 동의한다. 다만, 왜 시대를 망라하며 계속 강조되는 것일까. 라틴어에서 일본어로 트렌드까지 바꿔가며 계속 외치는 것일까. '코끼리를 생각하지마'라는 얘기를 듣는 순간 코끼리만 생각나는 것처럼, 불안한 마음을 막연한 문장에 기대려다보니 좌절감만 지속된다. 과연 어떻게 하면 불안하지 않을 수 있을까.


 현재를 산다는 건 사실 어렵다. 거기에다 불안을 생각하지 않으며 현재를 산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히라야마 아저씨처럼 몇 십년을 노력해도 하룻밤에 무너지곤 한다. 이 영화의 특이한 화면비율(4:3)처럼 제한된 틀 안에서 사유하며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다. 감정이란 애초에 통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알고 있지만 피하고 싶은 불편한 진실 같은 것이다. 영화는 혹시 이런 걸 얘기하려던 거였을까.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니 잠이 확 깼다. 영화 전반부는 솔직히 조금 지루했다.


 히라야마는 청소부다. 몸으로 매일 쓸고 닦고 비워낸다. 무료하고 답답한 일상을 보내는 것처럼 보인다. 젊은 동료(어쩌면 정말로 현재만 사는 친구)가 영화에서 세 번이나 물어본다. "왜 이런 일을 그렇게까지 해요?" 히라야마는 입을 열 필요가 없다. 표정과 행동으로 표현이 충분했다. 그에게 일은 일종의 수행이기 때문이다. 형태가 중요하지 않다. 사무직이였으면 마대자루가 키보드로 바뀔 뿐, 행위는 비슷했을 것이다. 그는 청소일처럼 본인의 마음도 매일 쓸고 닦고 비워낸다. 점심마다 코모레비를 즐기고 사진을 찍는다. 인화한 사진을 추려내며 기분과 기억을 청소를 한다. 절대 감정이 넘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는 삶이다. 그렇게 불안을 깎아내려 한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 롱테이크 씬이 강렬히 남는다. 나는 그의 얼굴에서 수조차가 떠올랐다. 안정적으로 주행하고 싶지만 코너를 돌때마다 요철을 만날때마다 물은 어쩔수 없이 출렁이는 횟감 수조차가 떠올랐다. 히라야마의 눈도 그러했다. 눈물이 넘쳐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곤 했다. 조금씩 흘러나오는 체액 덕에 그가 감추고 있던 마음 전체가 보이는듯 했다. 가슴이 뭉클해지고 답답해졌다. 히라야마의 감정은 흔들리는 차 안에서 억지로 부여잡은 컵, 엎지르진 않았지만 찔끔씩 넘쳐흐르고 있는 컵 같아보였다. 안쓰러웠다.


 우리는 현재를 살려고 노력하지만 현재만 살순 없다. 수조의 밑바닥 물처럼 오랫동안 쌓아온 감정이 있기 때문이다. 없었던 일이 되어버릴 수 없는 슬픔을 모두 비워내기는 어렵다. 태어났기에 지닐 수 밖에 없는 근원적 슬픔도 존재한다. 선술집 마마의 전남편처럼 ‘모르는 게 많지만 이대로 끝나게 되는’ 숙명을 지니고 있다. 끝이 있기에 공포스러운 것이 인생이다. 그렇기에 어떤 계기로든 감정은 넘쳐 흐를 수 밖에 없다. 컨트롤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애꿎은 불안에 집착하는 건 아닐까. 


 불안은 일상적인 덕분에 두렵지 않을 수 있다. 어쩔땐 안온함을 주기도 한다. 행위를 통해 제어가 가능하기도 하다. 히라야마의 생활처럼 말이다. 코모레비를 다시 떠올려 본다. 일렁이는 햇살이 예쁜 까닭은 나뭇잎 덕일지도 모른다. 작열하는 태양의 흑점은 사실 공포다. 그늘 덕에 만만한 햇볕으로 오인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뭇잎의 움직임이 근원적인 두려움을 잊도록 현혹시킨다. 우리는 바람이 너무 세게 불지만 않기를, 그늘이 거둬지지 않기만을 집중하면 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불안해야 한다. 어쩌면 불안은 생존을 위한 착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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