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글까지 쓰게 되었다
생각을 시작하게 된 건 작년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 덕분이다. 일기라고 하기엔 거창하다. 그 날 있었던 일(대부분 무엇을 맛있게 먹었는지)을 서른 칸 한 장으로 된 월력에 간략히 적어 두는 기록 행위였다. 계속 써나가다 보니 재미가 생겼다. 한 달을 다 채우니 내 자신이 막 기특하더라. 그래서, 추가적으로 술을 마신 날들을 빨간색으로 써보기 시작했는데 그게 화근이었다.
술은 내성적인 나에게 있어서 용기를 주는 요정이었다. 혼자 살던 시절엔 TV를 같이 봐주는 친구였고, 회사에서 털린 날엔 나를 위로해주는 애인이었다. 친구 놈들을 계속해서 만나게 할 구실이었으며, 맛집을 찾아다니게 만든 핑계이거니와, 불면을 해소시켜주던 묘약이었다. 술과 함께 나는 참 즐거웠다. 피붙이처럼, 어느 순간 당연히 내 삶의 일부분이 되었다.
회사원(어쩌면 사노비)의 습성으로 그 기록을 분석해 보았다. 1년에 222일, 그러니까 한 달로 치면 18번 남짓, 아 그러니까 일주일에 평균 4.2번. 충격이었다. 술을 안 마신 날이 더 적다. 요정님과 즐겼다고 하기엔 과했다. 가만있어보자.. 놀랜 마음을 다스리고자 냉장고에서 맥주캔을 꺼낼까 살짝 고민했다. 아, 이건 아니구나. 선종을 한 스님처럼 강력한 현타가 왔다. 그동안 마신 술이 다 깨는 기분이 들었다.
일기라는 녀석이 술과 나의 관계를 뒤틀기 시작했다. 어쩌면 떼어내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던 것일지도. 그 녀석 때문에 화려한 하이네켄과, 맨지르르한 처음처럼과, 저 멀리 이름도 생소한 스코틀랜드에서부터 찾아온 조니워커와 데면데면 해졌다. 술요정님을 찐하게 만나게 되면 도저히 일기녀석의 낯을 민망해서 볼 자신이 없었다. 나를 정말 불편하게 만드는 녀석이었다.
어쩌면 술과 친해져 나 자신을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사는 게 바쁘다고. 먼 친척처럼 나 자신과 마주하기 불편해했다. 차마 볼 자신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일기라는 녀석 때문에 그동안 많이 상처 입어온 나를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하루에 몇 글자, 고작 그 하찮은 녀석 때문에 말이다. 어쩌면 지금, 인생이 다른 방향으로 다시 뒤틀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