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야의 고수는 어디에나 있지
나는 지금 왕십리 지하철역 분당선 하행 열차를 기다리고 있다. 동시에 생각나는 대로 이 글의 초안을 쓰고 있다. 그것도 한 손으로. 다른 한 손에 뜨거운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있기 때문이고, 이는 글을 쓰게 한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왕십리 역사 안, 그러니까 환승지대에 있는 조그마한 가게에서 매일 커피를 사서 마시는데, 이 집 아주 특이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바리스타 사장님이 정말 특출 나시다.
왕십리역은 자그마치 네 가지 컬러의 호선이 만나는 역사이다. 그 말은 유동인구가 엄청나다는 뜻인데 나 역시 통근을 위해 이 곳에서 늘 지하철을 갈아 탄다. 명성은 왕십리역에서 내리기 전부터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객실 내의 거의 모두가 이 역에서 내리려고 한 곳의 문에 모이는 풍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앱으로 최단 환승통로를 검색했을 테니까. 그럴 때일수록 나는 태연히 다른 문 앞으로 가서 선다. 커피를 사러 가는 길은 이 문이 더 가까우니까.
카페라고 하기엔 여러 음식을 팔고, 슈퍼라고 하기엔 커피가 맛있다. 일종의 델리랄까. 델리만쥬도 팔고, 김밥도 팔고, 어묵도 판다. 심지어 요즘엔 마스크도 판다. 모든 이의 다양성이 충족되는 곳이다. 한국의 멜팅팟이라고 불리는 (나만 부르는) 왕십리역의 가게답다. 그래서 그런가 이 점포의 이름은 분명히 있겠지만 나는 잘 모른다. 중요한 건 이 집 아메리카노 무려 1,500 원이다. 그래, 이름이 뭐 중요한가. 이 곳은 여러 면에서 흡사 뉴욕의 델리 같은 곳의 면모가 있다.
이 곳에 대해 먼저 놀란 건 김밥이었다. 천 원에 반 줄. 작은 탄식이 나왔다. 아, 이 사장님 마케터구나. 모두 알다시피 우리나라 직장인들은 지하철 안에서 안정적으로 김밥 한 줄의 만찬을 즐기기 어렵다. 우리는 냄새를 풍길정도의 용기도, 볼이 볼록 나오게 쩝쩝거릴 염치도 없다. 쪽팔리니까 빨리 먹으면 된다? 현대인의 위장은 (특히나 아침의) 그리 관대하지 않다. 무엇보다도 그것을 용인해줄 타인들의 관용 또한 박하다.
하지만 반 줄이라면 어떨까? 갈아타러 걸어가는 길에 그리고 환승할 열차를 기다리는 5분여간에 김밥 다섯 알은? 해볼 만하다. 사장님의 머릿속엔 일찍이 보랏빛 소가 왔음이 분명했다. 유심히 지켜보기로 마음먹었다.
뉴욕 델리의 바리스타(이자 여러 잡화의 판매원이시기도 한) 사장님 아주머니. 일단 빠르다. 단순히 손이 빠르다는 얘기가 아니다. 상황에 따른 본인의 동선 대응이 놀랍다. 한 치의 망설임이 없는 상황 판단. 서너 손님의 주문이 동시에 몰렸을 때 빛을 발한다. 각 주문에 대응할 프로세스를 잘게 나누고 유연하게 그 과정을 섞는다. 나는 보았다. 장소는 정지해 있고 한 사람의 잔상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건 실제에서도 연출이 가능하다는 것을. 출근길 우리에게 필요한건 시간절약. 그 니즈를 정확히 충족해 주신다. 더욱 놀란 게 있다. 기 껏 해야 예닐곱 번 방문했던 내 얼굴도 익히셨나 보다. 카드를 두고 온 날 나에게 세상 쿨하게 말하셨다. 매일 오니까 내일 와서 한꺼번에 계산하라고. "Oh, She is so chill !"
니즈를 파악한다는 것은 공감력을 전제로 한다. 다른 사람의 상황과 감정을 상상할 수 있는 사람만이 원하는 걸 창출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섬세한 관심을 가질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이는 개인적으로 본디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마음이 변질되기도 한다. 타인의 아픈 곳을 알아채는 능력도 같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디어에선 보통 능력 있고 악독한 회사 임원들이 그렇게 그려지곤 한다. 실제로도 그렇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와중, 약국에서도 사기 힘들다는 마스크가 보이길래 냉큼 다섯 장 달라고 말씀드렸다. 분초를 다투시는 와중에도 세스 고딘 아주머니는 확인차 눈썹을 내리며 말씀하셨다.
"이거 KF94 아니에요. 일회용이에요"
다행이다. 내가 존경하는 이 분은 선한 마음의 소유자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