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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 연길 Mar 25. 2021

내 자신을 속일 수 없어지는 순간


 저는 요즘 극심한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이번 달 말까지 제출해야 하는 보고서 때문인데요. 지금이 25일인데, 어제까지도 어떻게 미룰 수 있을까 고민을 했었죠. 그런 제가 차암 한심하지만 또 익숙하기도 하네요. 월 초의 시한부 낙천은 제 마음을 속이는데 충분했지만 역시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팀장은 저번 주부터 무언의 압박을 주었고 그 후로 며칠간 저는 다시 불면증이 도지는 건 아닐까 염려를 해댔습니다. 저의 걱정이 걱정을 낳는 산모라면, 분명 인간은 아니고 몇 마리씩 한꺼번에 잉태하는 포유류 일 겁니다. 이런 습성들은 도대체 언제 어디서부터 발현이 된 것일까요.


 팀장은 25일이 다 되어서야 중간상황을 공유 받고 제가 준비가 덜 되었다는 걸 알아챘습니다. 같이 보고하러 가준 동료가 열심히 커버를 해주었지만, 저는 그 순간에도 속으로 보고 일정이 미뤄지길 바라고 있었네요. 피드백을 받을수록 생각보다 더 어려운 테스크임이 인식이 되었습니다. 이 걸 미리 알았더라면 아마 더 불안해했을까, 일찍이 정신 차리고 더 열심히 했을까 그런 생각도 그 와중에 잠시 했습니다. 두피가 뜨거워지고 호흡이 막 가빠지더군요. 태연한 척 대답을 하고, 중간중간 웃어보기도 했지만 어색했을 거예요. 주눅이 잔뜩 든 제 모습은 마스크를 뚫고 보였을 겁니다. 분명


 자리에 돌아가 앉았습니다. 발열 때문에 퓨즈가 나가버린 전자기기처럼 멍하니 앉아 있었네요. 초조한 마음에 PPT 슬라이드 스크롤을 올렸다가 내렸다가 해봤지만 막막하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두세 시간을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무용하기만한 야근을 했습니다. 그러고선 누가 들었으면 좋겠다는 듯 터덜 소리를 내며 집으로 돌아왔네요. 밥 맛도 없어서 우유만 두어 잔. 지금은 아직 오지도 않은 주말이 두려움으로 가득 찰까 봐, 그래서 행복하지 않을까 하는 창의적인 근심을 부둥켜안고 있네요. 당장은 잠이 오지 않을 오늘 밤도.


 어려서 꾸짖음 몇 번 받지 않고 자랐는데, 늘 혼날 걱정을 합니다. 이유 없이 늘 불안합니다. 남을 대할 때면 기본적으로 떨립니다. 깔볼까 봐 겁나기도 하고, 저를 미워하게 되진 않을까 염려합니다. 보여준 것도 없는데 실망하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을 합니다. 관계가 형성되면 배신 당하는 상상을 합니다. 정작 남들은 저에게 관심이 없는 게 불 보듯 뻔한데 혼자서 바쁜 셈이죠.


 그 이유를 찾아보려고 한 적도 있습니다. 회사에서 있었던 공포스러운 일들 때문일 거란 생각부터 거슬러 올라갔죠.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서 만난 친구들에 기죽었던 날도 생각해 봤고, 여드름이 볼에 올라오는 게 싫었던 고등학교 시절도 떠올려봅니다. 유년까지 가게 되면 이건 아니다 싶어 멈춥니다. 이럴 바엔 그냥 이렇게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게 편하기 때문이죠. 그래야만 부정적인 생각의 꼬리가 끊기더라구요. 5-6년간 정신적으로 수련하면서 겨우 얻어낸 방안입니다.


 체념의 정서에 기대어 잠시나마 달콤하게 살다가도 가끔 오늘 같은 날이 오면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간신히 토닥였던, 그렇게 속여왔던 유약한 자아가 정신을 차립니다. 그리고 이내 비명을 지르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네요. 양 팔을 들고 호들갑을 떨면서요. 저는 어쩔 수 없이 지켜볼 뿐입니다. 저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답답한 마음을 이야기할 곳이 없어 글을 써봅니다. 쓰다 보니 썩 유쾌하지 않은 글이 되어버렸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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