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살, 퇴사하고 세계여행
의료관광이 되어버린 태국 여행
여행 1일 차부터 귀에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아지기를 바랐는데, 나아지기는커녕 입을 벌리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심해지기만 했다. 갖고 있는 상비약으로는 통증이 완화되지 않아 방콕을 떠나긴 전 병원에 갔다.
우리나라 대학병원 분위기를 생각했지만 ‘방콕 범룽랏 국제 병원’의 첫인상은 고급 호텔 같았다. 특히 외국인 환자 비율이 높은 점이 신기했는데, 알고 보니 태국이 의료관광으로 유명해 많은 외국인이 방문한다고 한다. 해외에서 병원을 가는 건 처음이라 걱정했지만 한국어 통역사분이 상주하고 있어 어려움 없이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귀 통증은 ‘급성 외이도염’ 때문이었는데, 이전에도 겪어봤던 병이어서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처방받은 약과 면봉을 쓰지 말라는 의사 선생님의 충고와 함께 방콕을 떠나 치앙마이로 이동했다.
야간기차를 타고 이른 오전에 치앙마이에 도착한 후 숙소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열심히 치앙마이를 구경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난 응급실에 갔다.
통증은 저녁부터 시작됐다. 처음에는 왼쪽 옆구리가 쿡쿡 쑤시는 느낌이었는데 점점 허리까지 통증이 번지고 심해져 앉을 수도 누울 수도 없는 상태였다. 통증은 더 강해져 속도 울렁거리고 헛구역질까지 났다. 인터넷에 증상을 검색해 봐도 이유를 못 찾겠고,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새벽에 그랩을 타고 응급실로 갔다. 겁 많은 여행자라 밤에는 잘 돌아다니지도 않는데 통증이 겁을 이겼다.
여러 검사와 CT촬영 끝에 밝혀진 원인은 ‘급성 신우신염’이었다. 생전 처음 들어본 병명이고, 다음날 외래 진료 때도 증상이 나아지지 않으면 입원을 해야 할 수도 있다는 의사 선생님 이야기에 덜컥 겁이 났다. 우선은 진통제와 항생제를 처방받고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눈물이 계속 났다. 한국에서도 가본 적 없는 응급실을 하필 여행에서 오게 되다니. 그간 몸을 제대로 돌보지 않은 나 스스로에게 화가 나기도 하고, 내 몸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내 몸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무엇보다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 큰맘 먹고 여행을 온 건데 그 마저도 내 맘대로 안되니 세상이 내 의지를 힘껏 부정하는 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이런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이기 시작하니 앞으로의 여정을 계속해나갈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고,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사라졌다. 호스텔 방에서 꼬박 하루를 보내며 여행을 지속할지, 우선은 잠시 멈추고 한국을 돌아갈지 계속 고민했다. 앞으로의 긴 여정을 생각하면 한국으로 돌아가 몸을 회복하며 재정비의 시간을 갖는 게 나을 거 같다가도, 지금 돌아가면 다른 사람에게 패배자로 비칠 거 같으니 일단은 여행을 지속하자는 마음도 들었다.
그러다 이번 여행의 목표가 무엇인지 떠올렸고 목표 관점에서 고민을 하니 다른 사람의 시선보다는 나를 중심에 두고 생각할 수 있었다. 이번 여행의 목표는 ‘설렘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아가는 나로 돌아가기’였는데, 이 몸으로는 걱정, 근심으로만 가득 차 여행을 온전하게 즐길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여행을 중단하기로 했다.
여행 9일 차, 그렇게 나는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