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한 안식처, 탕비실

고백성사와 구조요청

by 조훈희

"미안해. 오늘도 늦을 것 같아. 아이들이랑 저녁 먼저 먹어"


개인적인 전화는 사무실에서 통화하면 누가 들을까 봐 탕비실에서 소곤소곤 짧게 마쳤다. 순간 나는 왜 탕비실에 숨어서 이런 통화를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사무실에서 전화하면 다른 동료들이 일하는데 방해가 될까 봐 미안해서일까?


생각해보면 야근을 하게 하는 주체와 사람들이 버젓이 내 앞에 있는데 왜 내가 야근한다고 통보하는 사실을 미안해하면서 해야 하지? 저기 앉아있는 실장님은 아무렇지 않게 야근하라고 말하는데, 난 왜 야근한다는 사실을 죄 지은 사람처럼 숨어서 아무 잘못도 없는 가족들에게 소곤소곤 통보해야 하지?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야근도 아니잖아? 오만가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을 보니 난 지금 여러모로 짜증이 한껏 나 있는 상태인가 보다.


"미안해. 아무래도 오늘 못 갈 것 같아."

라고 운을 떼며 탕비실에서 치루는 고백 성사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주로 나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사람은 어디에선가 나를 기다리는 가족과 친구들이다.


결혼 전에는 약속 장소에서 먼저 기다리던 지금의 아내인 당시의 여자 친구에게 퇴근을 못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한 적이 있었다. 졸지에 바람맞은 여자 친구를 달래야 했고 급하게 내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탕비실 물품을 뒤졌다. 동그란 파란 쓰레기통 뚜껑과 가늘고 기다란 복합기 토너 박스 마지막으로 폐토너 통으로 얼기설기 엮어서 마치 무인도 해변가에서 SOS를 돌멩이로 바닥에 써놓 듯이 한자 한자 써 내려갔다.


"사랑해"

탕비실에 널브러진 여러 가지 용품으로 글씨를 만들어서 사진을 찍었다. 그것은 무인도처럼 탈출할 수 없었던 회사원의 처절한 구조 요청이었다. 회사의 탕비실은 무인도에서 외부와 유일하게 소통하고 음식을 구할 수 있는 해변가 같은 곳이었다.


오늘도 답답한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나서 커피 한잔 마시려고 탕비실을 갔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핸드폰으로 속삭이던 한 젊은 직원이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재빨리 빠져나간다. 탕비실 테이블에 오손도손 둘러앉아서 ‘하하호호’ 대화를 하던 두 명의 직원도 정리를 하고 자리로 돌아간다.


저 젊은 직원들도 신입사원 시절의 내가 그랬듯이 탕비실에서 고백도 하고, 사과도 하고 답답했던 마음에 서로 얘기도 하면서 자기만의 여러 가지 역사를 써나가고 있겠지. 옛날 생각에 흐뭇하다가 갑자기 불안한 마음이 엄습한다.


내가 나가라고 한 적도 없는데 왜 다들 나가는 걸까?

내가 불편한가?

내가 벌써 이런 존재가 되어버린 걸까?

설마 내 욕하고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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