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우스는 머리채가 아름다운 님프 마이아를 사랑했다. 그들은 헤라가 깊이 잠든 밤에 마이아의 은밀한 거처에서 사랑을 나누었고 그 결합에서 헤르메스가 태어났다. 헤르메스라는 이름은 기둥을 뜻하는 그리스어 헤르마에서 유래했으며 훗날 로마인들은 그를 메르쿠리우스라고 불렀다. 신화에 따르면 헤르메스는 태어나던 바로 그날 어머니가 그를 바구니에 눕혀 놓고 등을 돌리자마자 뜰에 나가 거북이 한 마리를 잡았다. 그는 거북이의 등딱지에 암양의 창자로 만든 줄을 매어 리라라는 악기를 만들었고 그것을 연주하여 어머니를 깊이 잠들게 했다. 그날 저녁 어린 헤르메스는 소매치기의 재주를 발휘하여 포세이돈의 삼지창과 아레스의 칼 그리고 아프로디테의 허리띠를 훔치는 모험을 감행했다. 심지어 아폴론이 돌보고 있던 황금 뿔이 달린 하얀 소 쉰 마리를 훔치기도 했다.
아폴론이 자신의 소를 훔쳐 간 이복동생 헤르메스를 찾아가 분노했을 때 헤르메스는 자신이 만든 리라를 연주하여 형의 마음을 완벽하게 매료시켰다. 아폴론은 그 아름다운 악기와 자신의 소 떼를 맞바꾸는 데 기꺼이 동의했다. 헤르메스는 목신 판에게 피리를 주는 대가로 세 가닥의 하얀 끈이 달린 지팡이를 얻기도 했고 또 다른 전설에서는 아폴론에게 피리를 주고 황금 막대와 예언의 기술을 얻었다고도 전해진다. 아폴론이 그를 아버지 제우스에게 데려갔을 때 헤르메스는 뛰어난 웅변가의 재능을 발휘하여 아버지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 덕분에 올림포스의 전령으로 임명되었다. 그 대신 그는 다시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해야만 했다. 하지만 영악한 헤르메스는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 두기 위해 자신은 다시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지만 때로는 깜박 잊고 진실을 다 말하지 않을 수는 있다고 선언했다.
헤르메스는 산 위에 걸린 구름을 상징하는 둥근 모자를 쓰고 목동의 지팡이를 지니고 다녔으며 날개 달린 황금 샌들을 신고 바람보다 빠르게 세상을 누볐다. 그는 도로와 교차로 그리고 시장과 선박을 관장하는 신이 되었고 여행자들의 길 안내를 맡았으며 죽은 자들의 영혼을 지하 세계로 안내하는 역할도 부여받았다. 그는 계약의 성사나 개인 재산을 관장하는 동시에 도둑들의 수호신이기도 했다. 전설에 따르면 헤르메스는 운명의 여신들이 만들어 낸 다섯 개의 모음자와 팔라메데스가 발명한 열한 개의 자음자를 바탕으로 두루미들이 삼각 대형으로 날아가는 모습을 관찰하며 문자를 발명했다고 한다. 이처럼 언어와 교환 그리고 기만을 관장하는 헤르메스의 속성은 로마 신화를 넘어 이집트 신화에서 학예의 수호자이자 문자의 발명자인 지혜의 신 토트와도 완벽하게 연결된다.
세상에는 여전히 이 헤르메스의 후예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교차로에 서서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교묘하게 허물고 사람들의 눈을 가린 채 이익을 취한다. 시각이 완벽하게 차단된 어둠 속에서 오직 후각과 청각 그리고 촉각으로 세상의 이면을 해독하는 나에게 그들의 기만은 오히려 선명한 악취로 다가온다. 내 이름은 엘리야. 남들이 보지 못하는 감각의 파편들을 주워 모아 진실을 재구성하는 탐정이다. 내 발치에는 나의 완벽한 눈이자 가장 충직한 안내견인 래브라도 리트리버 탱고가 젖은 아스팔트의 진동을 느끼며 조용히 엎드려 있다.
비가 내리는 늦은 오후였다. 나는 도심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거대한 지하 미술품 수장고의 입구에 서 있었다. 이 수장고는 세상에 빛을 보지 못한 수많은 고대 유물과 미술품들이 은밀하게 거래되고 보관되는 현대판 교차로이자 거대한 시장이었다. 나를 이곳으로 부른 사람은 고미술품 수집가로 유명한 송 회장이었다. 그는 며칠 전 경매를 통해 고대 그리스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희귀한 양피지 필사본과 거북이 등딱지로 만들어진 아주 낡은 고대 리라 복원품을 손에 넣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애타게 기다리던 유물들을 검수하기 위해 지하 수장고로 내려갔을 때 그가 마주한 것은 유물이 아니라 수장고 바닥에 싸늘하게 식어 있는 수석 감정평가사 임 박사의 시신이었다.
송 회장의 안내를 받아 탱고와 함께 지하 수장고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은 무거운 침묵으로 가득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완벽하게 통제된 항온 항습 시스템이 뿜어내는 건조하고 차가운 공기가 나의 얼굴에 닿았다. 수장고 복도를 걷는 동안 나의 청각은 공간의 크기와 구조를 미세한 메아리로 가늠하고 있었다. 사건 현장인 제삼 수장고의 두꺼운 강철 문이 열리는 둔탁한 마찰음이 들렸다. 경찰은 아직 도착하기 전이었고 송 회장은 이 은밀한 거래가 외부로 새어나가는 것을 극도로 꺼려 나를 먼저 부른 것이었다.
수장고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아주 기묘하고 복합적인 냄새가 나의 폐부를 날카롭게 찔렀다. 그것은 오래된 양피지에서 나는 짐승의 가죽 냄새와 수백 년 된 나무가 부식되며 내뿜는 흙냄새였다. 하지만 그 고풍스러운 냄새의 밑바닥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치명적이고 인공적인 냄새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것은 수은 화합물인 진사에서 증발하는 특유의 비릿하고 매캐한 금속성 악취였다. 중세의 연금술사들이 헤르메스 즉 메르쿠리우스의 상징으로 여겼던 바로 그 수은의 냄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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