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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트 우드러프의 유혹

숲의 제왕이 숨겨둔 달콤한 독

by 김경훈

세상에는 이름만 들어도 위엄이 넘치는 식물이 있다.

독일어로 ‘발트마이스터(Waldmeister)’, 즉 ‘숲의 제왕’이라 불리는 스위트 우드러프가 그 주인공이다.

이름만 들으면 거대한 참나무나 웅장한 침엽수를 떠올리기 쉽지만, 사실 이 녀석은 숲의 바닥에서 수줍게 자라나는 소박한 허브다.

하지만 그 향기를 한 번이라도 제대로 맡아본 사람이라면 왜 이 작은 풀떼기가 ‘제왕’이라는 거창한 작위를 하사받았는지 단번에 이해하게 된다.

오늘 지식은 살 안 쪄요 매거진은 독일인들이 환장하는 초록색 마법, 스위트 우드러프의 이면을 낱낱이 파헤친다.



존재하지 않는 기억을 요리하는 법


저자는 아주 기묘한 임무를 맡았다.

음식 전문 잡지인 《아트 오브 이팅》에 실릴 글을 쓰기 위해,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진짜 스위트 우드러프’의 맛을 재현해내야 했던 것이다.

미국에서 자란 사람에게 스위트 우드러프는 가공된 인공 향료로만 접할 수 있는 낯선 존재다.

독일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가짜 향미가 아니라, 숲에서 갓 채취한 식물이 내뿜는 그 본연의 정수를 찾아가는 과정은 일종의 고독한 사고 실험과도 같았다.


기억에도 없는 향기를 추적하는 일은 안개 속을 걷는 것과 비슷했다.

갓 베어낸 목초의 싱그러움, 초록 풀잎의 알싸함, 그 뒤를 따르는 아몬드와 바닐라의 달콤함, 그리고 마치 슈거파우더를 뿌린 듯한 부드러운 향기까지.

스위트 우드러프는 여러 층의 소박한 향이 겹겹이 쌓여 있는 복합적인 존재였다.

저자는 독일의 푸짐한 전통 요리와 알싸한 추억이 배어 있는 이 향기를 상상만으로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854년부터 시작된 독일의 ‘초록색’ 집착


독일인들의 스위트 우드러프 사랑은 유별나다 못해 집요하다.

이들은 이 식물을 ‘발트마이스터’라고 부르며 봄철과 새 출발, 그리고 ‘초록’ 그 자체를 상징하는 향기로 숭상한다.

그 역사는 무려 85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륀 지역의 베네딕트회 수도사인 반달베르투스가 스위트 우드러프와 블랙커런트, 담쟁이넝쿨을 섞어 음료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시초다.


독일의 여름을 상징하는 밀맥주 ‘베를리너 바이세’에는 늘 초록색 인공 시럽이 들어간다.

그 시럽의 정체가 바로 발트마이스터다.

뿐만 아니라 아이스크림, 막대 사탕, 곰돌이 젤리 등 독일에서 파는 거의 모든 사탕에는 이 발트마이스터 맛이 빠지지 않는다.

미국 사탕이 온통 라임 맛으로 도배되어 있다면, 독일은 발트마이스터의 지배 아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4월 말부터 6월 초까지, 꽃이 활짝 피기 전의 스위트 우드러프는 독일인들이 가장 기다리는 계절 음료 ‘마이볼레(Maibowle)’의 주재료가 된다.

달콤한 화이트 와인과 스파클링 와인에 설탕을 섞고, 여기에 갓 수확한 발트마이스터의 싱싱한 가지를 우려낸다.

독일인들은 이 음료를 두고 ‘향수’라고 묘사한다.

갓 깎은 봄철 목초의 싱그러운 향미가 잔 속에 가득 차기 때문이다.



인내심이 빚어내는 향기, 쿠마린의 마법


스위트 우드러프의 향기에는 치명적인 비밀이 하나 있다.

갓 딴 싱싱한 상태에서는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줄기를 꺾어 코끝에 가져다 대도 그저 평범한 풀 냄새뿐이다.

하지만 이 녀석을 집에 가져와 몇 시간 동안 시들게 두면 마법이 시작된다.

식물이 죽어가는 과정에서 비로소 그 고유의 향기가 피어오른다.


이 향기의 핵심 성분은 ‘쿠마린(Coumarin)’이다.

건초, 바닐라, 계피 등에서 발견되는 이 화합물은 사실 독성이 있다.

이 때문에 미국에서는 식품첨가물로 사용이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독일인들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쿠마린의 부작용이라고 해봐야 기껏해야 심한 두통 정도인데, 그 황홀한 향기를 즐길 수 있다면 그 정도 고통은 기꺼이 감내하겠다는 심산이다.


저자는 진짜 마이볼레를 만들기 위해 처절한 시행착오를 겪었다.

처음에는 싱싱한 줄기를 한 시간 정도만 시들게 두었더니 밍밍하고 싱거운 물맛만 났다.

레시피를 다시 연구한 끝에 깨달은 진실은, 최소 8시간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침부터 꺾어온 줄기가 저녁 무렵 흐느적거리며 시들었을 때, 비로소 빵집에 들어선 듯한 달콤하고 알싸한 초록 향기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찰나의 미학, 유리그릇에 갇힌 요정


제대로 시든 스위트 우드러프를 와인에 담그는 시간도 정밀해야 한다.

너무 오래 담그면 잘린 자리에서 씁쓸한 흙내가 올라오기 때문에 30분에서 45분 사이가 적당하다.

얼음 대신 미리 얼려둔 레몬 슬라이스를 넣어 향기가 희석되는 것을 막는 디테일도 필요하다.


그렇게 완성된 마이볼레를 테이블로 옮길 때, 향기는 긴 꼬리를 그리며 뒤따라온다.

피처 안에서 피어오르는 강한 향기는 마치 유리그릇에 갇힌 요정처럼 신비롭다.

펀치의 거품이 꺼지기 전, 그리고 얼린 레몬이 다 녹기 전이 이 음료를 즐길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찰나다.

저자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직접 시럽을 만들고, 휘핑크림을 얹은 발트마이스터 푸딩인 판나 코타까지 만들어내며 존재하지 않던 기억을 실제의 맛으로 각인시켰다.



문학 속의 에로티시즘과 아가씨의 깔짚


스위트 우드러프는 ‘프로이엔베트슈트로’, 즉 ‘아가씨의 깔짚’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

과거 유럽에서는 봄철에 여성의 잠자리에 향기 좋은 허브를 두는 관습이 있었는데, 매트리스 속에 스위트 우드러프를 채워 넣었기 때문이다.

침대에 누울 때마다 건초 더미 속에서 뒹구는 듯한 아찔한 향기가 올라왔을 것이다.


이 묘한 매력 때문인지 문학 작품 속에서도 이 식물은 예사롭지 않게 등장한다.

요한 스트라우스 2세의 오페레타 제목이 되기도 했고, 귄터 그라스의 소설 『양철북』에서는 주인공 오스카의 첫 섹스 장면에 거품 이는 발트마이스터 소다가 등장한다.

달콤하면서도 어딘가 어지러움을 유발하는 이 향기는 무상한 여름날의 기억과 묘하게 얽혀 있다.



마무리하며: 지식은 살 안 쪄요


스위트 우드러프는 우리에게 기다림의 미학을 가르쳐준다.

살아 있을 때는 침묵하다가 시들어 죽어갈 때 비로소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향기를 내뿜는 역설.

그리고 독성이 있다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 치명적인 달콤함을 포기하지 않는 인간의 욕망.

지식은 아무리 먹어도 살 안 찌지만, 스위트 우드러프의 쿠마린 향기는 당신의 머릿속을 기분 좋은 두통으로 어지럽게 살찌울 것이다.

오늘 하루, 당신의 일상에도 시들어야만 비로소 향기를 내뿜는 무언가가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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