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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없는 방관자들

by 김경훈

회색 빌딩 숲 사이, 차가운 대리석으로 뒤덮인 '승리자의 광장'에는 언제나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권력과 부를 쥐고 세상을 자신의 것처럼 휘두르는 소수의 '늑대들'이 활보하는 곳이었죠.

그 광장 한구석 벤치 옆에는 리트리버 탱고가 앉아 있었습니다.

탱고는 사람들의 신발 소리에서 느껴지는 오만함과, 그 밑에 깔린 누군가의 억울한 떨림을 예민하게 읽어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광장의 분수대 옆에서 낡은 가방을 멘 어린 학생 '루카'가 물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때, 값비싼 정장을 입고 거만한 걸음걸이로 다가온 한 남자가 루카의 앞을 막아서며 호통을 쳤습니다.


"이봐, 새파랗게 어린놈이 어디서 감히 내가 마실 물을 흐려놓고 있는 거야?"


루카는 눈을 깜빡이며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물줄기의 가장 끝에 서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물을 마신다고 해서 위쪽의 물이 흐려질 리는 없는데요."


논리적인 대답에 할 말이 없어진 남자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다시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기억나는군! 작년에 이 광장에서 나를 비웃고 도망갔던 무례한 녀석이 바로 너였지?"


루카는 황당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작년에 이 도시에 살지도 않았고, 아직 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이었습니다."


또다시 궁지에 몰린 남자는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더니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루카의 멱살을 잡았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욕한 놈은 네 형이겠군! 네 형이 저지른 무례의 대가를 네가 대신 치러야겠다.

그러니 너무 원망하지 말라고!"


남자는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루카를 거칠게 몰아세웠습니다.

광장을 지나던 수많은 사람은 이 광경을 목격했지만,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돌렸습니다.

"내 일이 아니야", "나랑 상관없어"라는 무관심의 장막 뒤로 숨어버린 '그림자 없는 방관자들'이었습니다.


그때, 묵묵히 지켜보던 탱고가 자리에서 일어나 광장 중앙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탱고의 목소리는 광장의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졌습니다.


"멈추세요.

당신의 억지는 이 차가운 대리석보다 더 딱딱하고 고약하군요."


남자가 당황해 멈칫하자, 탱고는 광장의 사람들을 한 명씩 응시하며 말을 이어갔습니다.


"여러분, 보고 계시나요? 이 세상이 소수의 늑대에게 지배당하는 이유는 그들의 힘이 강해서가 아닙니다.

옳은 것을 옳다 말하지 못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외치지 않는 용기 없는 제삼자들의 '침묵' 때문이죠.

무관심과 방임은 늑대들에게 가장 맛 좋은 먹잇감이 됩니다."


탱고는 루카의 곁에 서서 남자를 향해 단호하게 짖었습니다.

그 당당한 기세에 눌린 남자는 웅성거리기 시작한 사람들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슬그머니 자리를 떠났습니다.

탱고는 루카의 손을 따뜻하게 핥아주며 사람들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용기 있는 제삼자가 단 한 명이라도 등장할 때, 정의롭지 못한 세상의 균열은 시작됩니다.

우리가 서로의 일이 아니라고 고개를 돌리지 않을 때, 비로소 어린양들이 마음 편히 목을 축일 수 있는 맑은 시냇물이 흐르게 될 것입니다."


광장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눈빛에는 이전과는 다른 작은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습니다.

탱고는 다시 벤치 옆 제자리로 돌아가 앉았습니다.

이제 광장의 공기는 조금 더 정의로운 무게를 담아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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