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 있다는 것, 존재가 있다는 것

by 김경훈

개새끼는 강아지, 말새끼는 망아지, 소새끼는 송아지이다.

여기까지는 정겹다.

우리네 삶과 밀접한, 친숙한 동물들의 어린 시절에는 어김없이 다정한 이름이 붙어있다.

닭의 어린 시절을 병아리, 개구리의 그것을 올챙이라 부르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마 인간과 가까운 존재에게만 허락된 특권이 아닐까, 하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목록을 아래로 더듬어 내려가다 보면, 이 안온한 가설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호랑이 새끼는 ‘개호주’, 곰 새끼는 ‘능소니’라는 낯선 이름으로 불린다.

한반도에서 호랑이와 곰이 인간의 친숙한 동반자였던 시절은 없었다.

오히려 공포와 경외의 대상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의 어린 생명에게는 고유한 이름이 부여되었다.

대체 이 명명의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이 의문은 수산물 코너에 이르면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띤다.

고등어 새끼는 ‘고도리’, 갈치 새끼는 ‘풀치’, 조기 새끼는 ‘꽝다리’이다.

이 이름들은 친밀함의 증표라기보다는 어획과 유통, 그리고 소비의 편의를 위해 붙여진 기호에 가깝다.

성체와는 다른 맛과 식감, 혹은 경제적 가치를 지니기에 붙여진 이름, 즉 철저히 인간의 유용성에 기반한 분절적 명명(Segmented Naming)인 셈이다.

이는 동물을 동등한 생명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아닌, 인간의 필요에 따라 대상을 분류하고 통제하려는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적 세계관의 단적인 예이다.


예전에 지인과 함께 시끌벅적한 수산시장을 찾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반짝이는 은빛 생선들을 보며 아는 체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자그마한 갈치 떼를 가리키며 “저것은 풀치라고 부르는 거야.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어린 갈치지.”라고 설명했다.

그때, 생선을 다듬던 상인의 무심한 한마디가 날아들었다.

“풀치는 맞는데, 그 옆에 놈은 그냥 작은 갈치여. 더 커도 저만할 놈.”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같은 크기, 같은 모양을 하고 있음에도 어떤 것은 ‘풀치’라는 고유한 이름으로 불리며 성장 가능성을 인정받고, 어떤 것은 그저 ‘작은 갈치’로 규정되어 버리는 현실.

그곳에는 생물학적 분류가 아닌, 시장의 논리와 인간의 판단만이 존재했다.

‘고도리’라는 이름은 알아도 정작 시장에서는 ‘작은 고등어’만이 유통되는 현실처럼, 이름은 존재하지만 호명되지 않는 수많은 생명이 있는 것이다.


촉각과 청각, 그리고 언어로 세상을 구축하는 입장에서, 이름의 부재는 곧 존재의 소멸과도 같이 느껴진다.

이름이 붙여진다는 것은 단순히 기호가 하나 늘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고유한 존재론적 지위(Ontological Status)를 부여받고, 비로소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의미이다.

‘강아지’라는 이름 속에는 보호받고 사랑받아야 할 여린 생명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담겨 있지만, ‘작은 갈치’에게는 오직 크기와 상품성만이 남을 뿐이다.


결국 동물의 새끼 이름은 인간과의 친밀도라는 낭만적인 기준이 아닌, 인간의 관심과 필요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언어적 위계(Linguistic Hierarchy)를 반영한다.

우리의 언어는 우리가 관심을 두는 것, 통제하고 싶은 것, 이용 가치가 있는 것을 중심으로 촘촘하게 발달해 왔다.

그 그물코 사이로 이름 없는 수많은 ‘새끼’들은 그저 ‘작은 무엇’으로 스러져 간다.


이는 비단 동물에게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세상 모든 존재는 저마다의 이름으로 불릴 때 비로소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다.

세상 모든 ‘새끼’들에게 고유한 이름이 붙여지는 날을 상상해 본다.

그것은 아마도 세상의 모든 존재를 그 자체로 온전히 인정하는 진정한 의미의 공존이 시작되는 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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