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 대한’에 대한 고찰

by 김경훈

언어는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네 그릇에는 온갖 군더더기가 끼기 시작했다.

특히 ‘~에 대한’ 혹은 ‘~에 관한’이라는 표현이 그렇다.

‘먹돌이 탱고의 간식 고찰’이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먹돌이 탱고의 간식에 대한 고찰’이라고 써야만 직성이 풀리는 듯하다.

당장 브런치 플랫폼에 ‘고찰’이라는 단어만 검색해 봐도, 열에 아홉은 ‘~에 대한 고찰’의 형태를 띤다.

마치 ‘~에 대한’이라는 사족(蛇足)을 붙이지 않으면 글의 권위가 서지 않는다고 믿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명백한 어휘적 군더더기(Pleonasm)이자, 간결함을 미덕으로 삼는 우리말의 경제성을 해치는 주범이다.

소리 내어 읽을 때마다 혀에 돌기가 돋는 듯 이물감이 느껴진다.

언어의 논리적 구조와 청각적 질감에 더 의지해 세상을 파악하는 입장에서는 이 불필요한 장식음이 더욱 거슬리게 다가온다.

그것은 명료해야 할 사고의 길목에 파놓은 교묘한 함정과도 같다.


며칠 전, 탱고와 함께 한여름의 공원을 산책하던 중의 일이다.

잠시 벤치에 앉아 탱고의 묵직한 머리를 무릎에 뉘고 바람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때 한 중년 남성이 다가와 감탄 어린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그는 탱고의 영특함과 사회적 기여에 대해 한참을 칭찬하더니, 이내 학구적인 지식욕을 드러냈다.


문제의 발언은 이랬다.

“이처럼 훌륭한 안내견의 훈련 과정에 관한 전문적인 시스템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이 궁금해지는군요.”


순간 머릿속에서 언어의 교통체증이 일어났다.

‘안내견 훈련 시스템에 관한… 과정에 대한… 고찰?’ 빙글빙글 맴도는 수식어의 향연 속에서 정작 질문의 핵심은 아득해졌다.

이 복잡다단한 문장을 해독하려 애쓰는 짧은 침묵의 시간.

바로 그때였다.

무릎 위에서 얌전히 있던 탱고가 고개를 번쩍 들더니, 남성의 손등을 핥고는 “푸우” 하고 세상에서 가장 무심하고 커다란 하품을 해버렸다.


그 순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남성의 현학적인 문장과 탱고의 원초적이고 명료한 반응이 만들어 낸 희극적인 부조화.

하지만 그 웃음 끝에는 서글픔이 남았다.

우리는 어째서 이토록 간단하고 진실한 교감의 순간에조차, 이토록 복잡하고 인위적인 언어의 갑옷을 둘러야 하는가.

이는 일본어 번역 투(~に関する, ~についての)에서 비롯된 번역체 문장의 오랜 병폐로, 생각을 명료하게 드러내기보다 안갯속에 감추는 역할을 할 때가 더 많다.


탱고는 ‘안내견 훈련의 어려움’은 온몸으로 알지만, ‘안내견 훈련의 어려움에 관한 고찰’ 따위는 알지 못한다.

그는 그저 주인의 안전이라는 단 하나의 명제를 향해 정직하게 움직일 뿐이다.

우리의 언어 역시 그러해야 한다.

생각을 복잡하게 포장하는 기술이 아니라, 생각의 본질을 가장 정확하게 드러내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오늘도 수많은 글 속에서 ‘~에 대한’이라는 군살이 무분별하게 붙어 의미의 혈액순환을 방해하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에 대한 고찰’이 아니라, 탱고의 하품처럼 군더더기 없는 존재 자체의 명료함일지도 모른다.

언어에서 불필요한 지방을 걷어낼 때, 비로소 생각의 근육이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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