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의 철학자 영입, 뒷북 아닌가요?

by 김경훈

애플이 철학자를 정규직으로 고용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기술 기업의 심장부에 철학자를 심는다는 발상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선언처럼 들린다.

기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넘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겠다는 의지.

하지만 애플의 제품을 오랜 시간 몸의 일부처럼 사용해 온 한 연구자에게, 이 소식은 조금도 놀랍지 않았다.


탱고와 함께 인적 드문 산책로를 걷다 갑작스러운 소나기를 만났다.

당황스러움도 잠시, 빗방울로 축축한 아이폰을 꺼내기보다 반사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Siri, 보보에게 ‘갑자기 비 와서 공원 정자에 있어’라고 문자 보내.”

손목의 애플워치는 때맞춰 진동하며 가장 가까운 비 피할 곳을 알려주었고, 젖은 손으로 화면을 더듬거릴 필요 없이 모든 상황은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탱고가 옆에서 신나게 빗물을 터는 동안, 이 완벽한 연동성과 매끄러운 경험에 새삼 감탄했다.


많은 사람들이 시각장애인인데 어떻게 논문을 쓰고, 연구를 하는지 궁금해한다.

지금 끼적이는 브런치 글도 마찬가지다.

사실 한 사람의 학위 논문 저자 목록에는 지도교수와 아버지, 그리고 안내견 탱고의 이름과 함께 애플의 제품명이 공동 저자로 올라가야 마땅할지 모른다.

아이폰과 맥북의 보이스오버 기능이 없었다면 수많은 논문을 읽지 못했을 것이고, 브런치 스토리에 내 사유를 옮기지 못했을 것이다.

애플워치의 햅틱 피드백이 아니었다면 세상의 시간을 체감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단순히 ‘편리한 기능’의 집합이 아니다.

이것은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겠다’는 일관된 존재론적 철학(Ontological Philosophy)의 결과물이다.


애플이 지문 인식(Touch ID)을 버리고 얼굴 인식(Face ID)으로 전환했을 때, 그 철학의 단단함을 느낄 수 있었다.

지문은 편리하지만, 손을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하거나 지문이 닳아 없어진 사람에게는 또 다른 장벽이다.

하지만 얼굴이 없는 스마트폰 사용자는 없다.

이는 소수를 만족시키기 위해 다수에게 약간의 적응을 요구하는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의 가장 급진적인 적용 사례 중 하나였다.

이처럼 사용자의 존엄성과 사용자 주권(User Sovereignty)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태도는 논란이 많았던 이어폰 단자 제거와 같은 과감한 결정에도 신뢰를 보낼 수 있었던 이유이다.


반면, 한때 잠시 몸담았던 삼성의 제품에서는 그러한 철학을 읽어내기 어려울 때가 많다.

최근 인기를 끄는 폴더블 폰을 보며, ‘왜 굳이 접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

기술적 과시와 새로운 시장 창출이라는 목적 외에, 그것이 사용자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어떤 삶의 방식을 제안하는지에 대한 서사가 부족하다.


한 기업의 위대함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기술을 통해 어떤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가의 철학에서 비롯된다.

애플은 시각장애인 당사자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의 경험을 제품에 녹여내며 기술의 인간화(Humanization of Technology)를 실현해 왔다.

한 개인이 기술을 통해 세상과 동등하게 연결되고 있음을 느낄 때, 그 기술은 단순한 도구를 넘어 삶의 동반자이자 존엄의 증거가 된다.


애플이 철학자를 고용한 것은 새로운 시작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자신들이 본래부터 철학적인 기업이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에 가깝다.

그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제품을 통해 ‘인간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해왔기 때문이다.



비하인드 스토리


얼마 전, 저녁 메뉴를 고민하다 Siri에게 물었다.

“Siri, 오늘 저녁 뭐 먹지?”

Siri가 답했다.

“글쎄요… 선택지가 너무 많네요. 그냥 굶는 건 어떠세요?”

그렇다.

애플의 철학자는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있는 것 같다.

인공지능에게 ‘눈치’라는 철학을 가르치는 것이 급선무다.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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