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류의 적과 마주했다.
놈은 총이나 칼 대신, 매끈한 터치패드와 눈부신 액정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 이름은 바로 ‘스마트홈’이다.
디자이너들이여, 듣고 있는가?
당신들이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그 물건은 집이 아니라 최첨단 기술로 지은 감옥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감옥의 한복판에 내던져졌다.
잠시 대구를 떠나 다른 도시에 머물게 되었다.
숙소는 가격과 위치가 더없이 좋았던 에어비앤비로 정했다.
호스트가 멀리 상주한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지만, 시각 보조 애플리케이션의 성능을 믿었기에 큰 문제가 아닐 것이라 여겼다.
그것은 첨단 기술에 대한 현대인의 합리적인 믿음이자, 곧이어 벌어질 처절한 사투의 서막이었다.
숙소는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브랜드의 고급 오피스텔이었다.
그리고 비극은 건물 현관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번호 키패드는 물리적 버튼이 없는 매끈한 터치패드였다.
다행히 때마침 들어오던 입주민의 도움으로 첫 번째 관문을 통과했다.
하지만 엘리베이터에 들어서는 순간, 아찔한 절망감이 밀려왔다.
26층까지 올라가야 하는데, 층수 버튼마저 모조리 터치식이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스마트폰 어플의 안내를 받아 목적지인 호실 앞에 섰을 때, 최악의 관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도어록은 터치식인 데다 버튼 간격이 비좁았고, 결정적으로 비밀번호를 한 번 틀릴 때마다 숫자 배열이 제멋대로 바뀌는 보안 기능이 탑재되어 있었다.
그것은 보안 장치가 아니라, 마치 사용자의 접근을 거부하도록 설계된 인터페이스의 적대성(Interface Hostility) 그 자체였다.
안내견 탱고가 옆에서 꼬리를 치는 소리만이 유일한 위안인 채로, 30분간 땀을 뻘뻘 흘리며 사투를 벌이다 결국 옆집 사람의 도움으로 겨우 문을 열 수 있었다.
긴 사투 끝에 찾아온 허기를 달래기 위해 치킨을 주문했다.
잠시 후, 배달원이 도착했다는 벨이 울렸다.
하지만 문을 열어줄 수가 없었다.
현관문을 여는 인터폰 버튼 역시 한 뼘짜리 터치스크린 액정 안에 숨어 있었다.
문밖의 배달원은 초조해하고, 안에서는 탱고가 치킨 냄새에 흥분해 짖어대는데, 정작 문을 열어줄 방법이 없었다.
이 희극적인 상황은 기술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행위마저 어떻게 방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서글픈 증거였다.
실내는 찜통이었다.
에어컨 리모컨은 보이지 않았고, 벽에 붙은 온도 조절 장치는 어김없이 터치식이었다.
온도를 낮추려 더듬거리며 액정을 눌렀지만, 방 안은 오히려 사우나처럼 뜨거워졌다.
이 모든 장치가 내 집이었다면 점자 스티커를 붙이든, 음성 인식으로 연동하든, 얼마든지 길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타인의 공간, 일시적인 체류지에서 사용자는 이 모든 기술적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될 뿐이다.
이 경험은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의 부재가 개인의 신체적 자율성(Bodily Autonomy)을 어떻게 파괴하는지에 대한 생생한 보고서이다.
‘스마트’라는 이름 아래 행해지는 디자이너들의 미학적 탐닉이 누군가에게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는 감옥을 만든다.
기술은 인간을 자유롭게 해야 하지만, 그 기술의 발전 방향이 오직 시각 중심적으로만 흐를 때, 그것은 새로운 기술적 소외(Technological Alienation)와 차별의 도구가 될 뿐이다.
그날 밤, 뜨거운 방 안에서 식어버린 치킨을 먹으며 생각했다.
첨단 기술이 만들어낸 이 ‘스마트홈’은 집이 아니라, 모든 문턱에서 타인의 허락과 도움을 구걸해야 하는 거대한 미로에 불과했다.
진정한 스마트홈이란, 기술을 과시하는 집이 아니라 그 안에 사는 모든 사람의 삶을 포용하고 존중하는 집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