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저시급 노동자인가, 대성당 건축가인가?

by 김경훈

최근 장애인 자립생활 연구를 위해 세 명의 활동보조사를 만났다.

똑같은 일을 하는데, 이분들 머릿속은 완전히 다른 우주였다.

1번 우주부터 탐사해보자.


첫 번째 활동보조사는 깊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솔직히 말해, 그냥 시간 때우는 일이죠.

최저시급 받고 감정노동까지 하는 고된 일일 뿐입니다.”

그는 지금, 의미 없는 돌을 깨고 있을 뿐이었다.


두 번째 활동보조사는 좀 더 현실적이었다.

“이 나이에 이만한 일 구하기 쉽지 않아요.

가족들 생각하면, 책임감을 갖고 해야죠.”

그는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돌을 깨는 노동자였다.


세 번째 활동보조사의 눈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이 일은요, 한 사람의 ‘자립’이라는 이름의 대성당을 함께 짓고 있는 겁니다.”


자, 여기서 칼 마르크스 옹을 소환해보자.

첫 번째 활동보조사는 자신의 노동이 가진 사회적 가치로부터 단절된 ‘노동 소외(Alienation of Labor)’ 상태에 있다.

반면 세 번째 활동보조사는 빅토르 프랭클 선생의 ‘로고세러피(Logotherapy)’를 실천한다.

‘일상적 도움’이라는 행위가 ‘한 인간의 주체적 삶을 지지한다’는 궁극적 목적과 연결될 때, 모든 수고는 존엄한 가치를 지닌다.


하지만 잠깐! ‘대성당’이라는 말에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엔 아직 이르다.

이 아름다운 포장지가 열악한 노동 조건이라는 썩은 상자를 감추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해봐야 한다.

‘자립’이라는 대성당은 결코 한 사람의 헌신만으로 지어져서는 안 된다.

정당한 노동의 대가라는 튼튼한 철근과 사회적 지원이라는 견고한 시멘트가 없다면, 그 성당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부실공사일 뿐이다.


더욱이 장애 당사자를 ‘건축 재료’ 취급하며 혼자 대성당을 지으면 그건 그냥 흉물이다.

진정한 ‘대성당’은 지원을 제공하는 이와 제공받는 이가 함께 설계하고, 서로의 존엄성을 존중하며 벽돌을 쌓아 올릴 때만 완성될 수 있다.

이는 페미니즘 철학의 ‘돌봄 윤리(Ethics of Care)’가 강조하듯, 일방적 원칙이 아니라 구체적인 관계와 상호 의존성 속에서 구성되는 윤리이다.


일을 하는 올바른 자세란, 단순히 ‘대성당을 짓고 있다’고 자기 최면을 거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첫 번째 활동보조사의 고단함을 공감하고, 두 번째 활동보조사의 현실적인 무게를 이해하며, 우리가 함께 짓는 이 ‘자립’이라는 대성당이 과연 튼튼한 기반 위에 세워지고 있는지 끊임없이 성찰하는 과정이다.

진정한 의미는 숭고한 이름표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평등한 관계 속에서 피어난다.



비하인드 스토리


얼마 전, 마감이 임박해 힘들어하는 보보를 위해 ‘자립’이라는 대성당을 지어주기로 결심했다.

그녀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깨끗한 환경=업무 효율’이라는 나만의 신념으로 그녀의 책상을 완벽하게 정리했다.

흩어진 서류는 종류별로, 펜은 색깔별로.

완벽했다.

돌아온 그녀의 첫마디.

“자기야… 내 서류더미… 그거 다 순서가 있는 거였는데…?”

그렇다.

나는 대성당이 아니라 바벨탑을 쌓았던 것이다.

그날 밤, 나는 그녀가 다시 ‘혼돈의 질서’를 구축하는 동안 얌전히 소파에서 벌을 서야 했다.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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