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은 생각이 아니라, 몸에 새겨지는 물리적 사건이다.
분노나 억울함 같은 감정은 ‘부당하다’는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심장이 쿵쾅거리고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신체의 격렬한 반응으로 먼저 찾아온다.
이성은 그 모든 폭풍이 지나간 뒤에야 상황을 정리하고 명료한 단어를 찾아내는 느긋한 사후 분석가에 가깝다.
며칠 전, 보보와 분식집에서 점심을 먹고 캠퍼스를 걷고 있었다.
그날은 유난히 더워 안내견 탱고는 잠시 연구실에 두고 나온 터였다.
늘 탱고의 하네스를 쥐던 왼손에는 후식으로 산 1리터짜리 거대한 아이스커피 컵이 들려 있었다.
오른손으로는 보보의 팔을 잡고 길을 안내받고 있었다.
평화로운 일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때였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누군가가 아무런 감속 없이 어깨를 강하게 부딪치고 지나갔다.
그 충격으로 왼손에 있던 1리터짜리 커피는 고스란히 상반신을 향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차가운 액체가 옷을 적시고, 끈적한 설탕물이 살갗을 타고 흐르는 끔찍한 감각.
갑작스러운 충격과 축축함, 당황스러움이 한꺼번에 덮쳐오는 감각 과부하(Sensory Overload) 상태.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며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것은 위험 앞에서 몸이 즉각적으로 보이는 투쟁-도피-경직 반응(Fight-Flight-Freeze Response) 중, 완벽한 ‘경직(Freeze)’ 상태였다.
몸은 이미 공격을 당했지만, 뇌는 아직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고 대응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것이다.
어깨를 부딪친 사람은 잠시 힐끗 돌아보더니, 별일 아니라는 듯 그냥 가려 했다.
그 찰나의 부조리극을 깬 것은 보보의 목소리였다.
경직된 침묵을 뚫고, 그녀의 입에서 분노가 터져 나왔다.
“저기요. 그냥 가시면 어떡합니까? 사과하셔야죠.”
그녀의 목소리는 아직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몸 안에서 맴돌던 억울함과 분노를 대신 터뜨려준 대리적 분노(Vicarious Anger)였다.
그제야 상대는 마지못해 “아, 네. 죄송합니다.” 한마디를 던지고는 황급히 자리를 떴다.
이 일련의 과정은 감정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충격, 차가움, 끈적임이라는 원초적인 감각이 먼저 몸을 지배했고, 그로 인한 경직 상태가 뒤따랐다.
‘화가 난다’ 거나 ‘사과를 받아야 한다’는 사회적이고 논리적인 생각은 한참 뒤에야, 그것도 보보라는 외부의 조력자를 통해 겨우 발화될 수 있었다.
그날의 기억은 ‘무례한 사람’이라는 생각보다, 어깨에 가해진 둔탁한 충격과 온몸을 적시던 커피의 차갑고 끈적한 신체화된 감정(Embodied Emotion)으로 훨씬 더 선명하게 남아있다.
우리는 감정을 머리로 겪는다고 착각하지만, 사실 우리의 몸은 가장 정직하고 예민한 감정의 기록지이다.
그 기록을 제대로 읽어줄 때, 비로소 우리는 스스로의 마음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