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판사님, 사랑도 코딩이 되나요?

by 김경훈

인공지능? 그거 완전 내 최애 비서다.

글자 읽어줘, 길 알려줘, 못 보는 세상 그려줘.

이쯤 되면 월급이라도 줘야 하는 거 아닌가?

기술의 발전은 누군가에게는 재앙의 전조일지 모르나, 시각장애인에게는 세상과 단절을 잇는 새로운 눈과 귀가 된다.

기계는 도구를 넘어, 인간 경험을 확장하는 ‘감각의 대행자’가 되어간다.


하지만 스티븐 호킹과 일론 머스크 같은 형님들이 경고했다.

이 편리한 비서가 언젠가 회장님 자리를 넘보는 날이 올 거라고! 기술은 언제나 축복과 재앙이라는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다.

다이너마이트가 전쟁을 낳았고, 핵에너지가 멸망의 가능성을 열었듯, 인공지능도 그 경계 위에 서 있다.


사실 기계가 인간을 뛰어넘으려는 욕망은 신상도 아니다.

구약의 바벨탑은 인간 오만의 붕괴를, 미국 1달러 지폐의 ‘전지적 눈’은 인간 야망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다.

기술이 신의 자리를 넘보는 지금, 우리는 어떤 신념으로 그 무게를 감당할 것인가.


그러나 그 ‘전지적 눈’이 과연 인간의 고통과 기쁨, 사랑과 슬픔을 읽어낼 수 있을까.

수십억 개의 렌즈로 세상을 감시하는 인공지능은 많은 것을 ‘볼’ 수 있지만, 정작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궁극의 맹인이 될 수도 있다.

진정한 통찰은 눈을 감고, 타인의 상처에 마음을 겹쳐보는 경험에서 비롯된다.

기계는 정보를 모으지만, 인간은 의미를 만든다.


결국 인공지능이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세계, 바로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이라는 인간 고유의 영역이 있다.

불교의 자타불이(自他不二), 유교의 수기치인(修己治人), 그리스도교의 사랑은 모두 타인의 내면을 공감하며 공동체를 완성해 가는 정신적 전통이다.

이런 세계는 알고리즘의 연산으로는 도달할 수 없다.

데이터는 영혼을 측정할 수 없고, 프로그래밍은 연민을 코드화할 수 없다.


기술적 특이점(Technological Singularity)의 문턱 앞에서, 인류는 또다시 선택을 요구받고 있다.

기계의 눈으로 더 많은 것을 보는 것에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마음으로 더 깊은 의미를 추구할 것인가.

미래는 기술이 결정하지 않는다.

미래는 그 기술을 어떻게 사용할지 결정하는 바로 당신의 영혼에 달려 있다.



비하인드 스토리


며칠 전, 보보가 새로 찍은 탱고의 ‘인생샷’이라며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호기심에 최신 인공지능 이미지 분석 앱으로 사진을 읽어보았다.

AI의 분석 결과: ‘갈색 털을 가진 대형 포유류가 낡은 카펫 위에서 잠들어 있음.

슬픔 또는 권태의 감정이 느껴짐.’

실제 상황: 탱고는 거실 소파 위에서, 방금 간식을 먹어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자고 있었다.

그렇다.

인공지능은 낡은 소파를 카펫으로, 행복을 슬픔으로 읽어내는 눈치 제로의 맹인이었다.

그날, 나는 녀석의 딥러닝을 돕기 위해 ‘이건 행복이란다, 이 멍청아’라고 가르쳐주었다.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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