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 발 그림에 담긴 거대한 세상

by 김경훈

점자를 처음 배우던 시절의 막막함은 아직도 생생하다.

사실 지금도 점자를 떠올리면 막막하고 잘 읽지 못한다.

여섯 개의 점으로 이루어진 한 칸의 점자는 그저 무의미한 돋음의 배열일 뿐이었다.

손끝으로 수없이 더듬어도 ‘ㄱ’과 ‘ㄹ’의 미세한 차이는 안갯속처럼 흐릿했다.

세상을 열어줄 열쇠라는데, 눈앞에 있는 것은 열쇠가 아니라 풀리지 않는 자물쇠뿐인 듯했다.

선생님의 지시는 단호하고 지루했다.

“다른 생각 말고, 이 한 칸의 모양에만 집중하세요.”

왜 이다지도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글을 익혀야 하는지, 야속한 마음이 들었던 그 끝없는 반복의 시간.

그러다 어느 순간, 마법처럼 그 점들의 배열이 하나의 ‘글자’로 인식되고, 단어가 되고, 문장이 되어 손끝에서 의미의 강물이 조금 흐르기 시작했다.

그제야 깨달았다.

가장 작은 단위 하나를 온전히 체화하지 않고서는 더 큰 세계로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이 점자 학습의 경험은 훗날 입체파의 거장이 된 피카소의 유명한 일화와 겹쳐진다.

아들의 천재성을 일찍이 간파한 아버지가 어린 피카소에게 1년간 오직 비둘기 발만 그리게 했다는 이야기.

이는 단순히 한 가지 대상을 지겹도록 그리게 한 훈련이 아니다.

교육심리학에서 말하는 ‘의도적 훈련(Deliberate Practice)’의 원형에 가깝다.

명확한 목표(사물의 본질적 형태 파악)를 가지고, 자신의 기량을 넘어서는 과제를(수없이 다른 비둘기 발의 미세한 차이 관찰), 의식적으로 반복하는 과정.

피카소의 아버지는 아들이 하나의 대상에 대한 미시적 숙달(Micro-Mastery)을 통해, 모든 사물을 관통하는 보편적 원리—구조, 명암, 질감, 생명력—를 깨치기를 바랐던 것이다.


물론 이 일화는 피카소라는 천재를 설명하기 위해 후대에 윤색된 설립 신화(Foundational Myth)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신화가 오랫동안 설득력을 갖는 이유는 그것이 전문성 형성의 핵심 원리를 관통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사회는 넓고 얕은 지식을 강요한다.

여러 SNS 채널을 동시에 훑어보고,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수박 겉핥기식으로 소비하는 것이 미덕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이러한 정보의 파편들은 서로 연결되지 못한 채 표류하다가 금세 사라져 버린다.

반면, 하나의 우물을 깊게 파는 행위는 전혀 다른 차원의 학습을 가능하게 한다.


피카소가 비둘기 발의 구조에서 인체의 비례를, 발톱의 질감에서 사물의 그림자를 보았듯, 깊은 지식은 다른 영역으로 뻗어 나갈 힘을 갖는다.

이를 ‘학습의 전이(Transfer of Learning)’라 부른다.

하나의 프로그래밍 언어를 완벽하게 익힌 개발자가 다른 언어를 쉽게 배우고, 한 시대의 역사를 깊이 파고든 사학자가 다른 시대의 사회 구조를 꿰뚫어 보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핵심은 표피적 사실의 암기가 아니라, 그 안에 숨겨진 근본적인 ‘패턴 인식(Pattern Recognition)’ 능력을 습득하는 데 있다.


세상을 ‘본다’는 행위 역시 마찬가지이다.

수많은 풍경을 눈으로 스쳐 지나가는 것만으로는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시각 정보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하나의 대상에 더욱 깊이 몰입하게 하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소리 하나에 담긴 무수한 정보의 결을 분석하고, 손끝의 질감 변화로 사물의 역사를 읽어내는 행위.

이는 피카소가 비둘기 발에서 우주를 본 것과 다르지 않다.


어설프게 여러 가지를 아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

진정한 앎은 하나의 작은 세계를 지독하게 파고들어, 그 안에서 거대한 보편의 원리를 발견해 내는 데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정보의 홍수가 아니라, 비둘기 발 하나를 끈질기게 들여다볼 수 있는 집중력과 용기이다.

그 작은 발 하나에, 우리가 보아야 할 세상의 모든 것이 담겨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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