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망이를 늦게 휘둘러야 하는 이유

by 김경훈

새로 산 인공지능 스피커에게 “오늘 날씨 어때?”라고 물었다.

1초의 지연도 없이 녀석은 현재 기온, 습도, 풍속, 미세먼지 농도까지 완벽한 문장으로 읊어주었다.

그 눈부신 속도 앞에서, 문득 서늘한 공포를 느꼈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토록 ‘빠른 정답’에 익숙해졌을까.


세상은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

업무는 물론 사람과의 만남도, 인생도 터무니없이 빨라졌다.

밥 먹는 시간을 아끼려 냉동식품을 먹고, 정확하고 신중한 사람은 무능력자 취급을 받기도 한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 예견한 ‘제3의 물결’, 즉 정보화 시대는 우리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약속하는 듯했지만, 그 이면에는 ‘속도’라는 새로운 폭군이 도사리고 있었다.

토론토대 샌포드 드보 교수의 연구처럼, 속도에 쫓기는 사람들은 오히려 시간과 효율을 낭비한다.


이 역설의 가장 완벽한 비유는 야구 타석에 있다.

높은 타율을 자랑하는 타자는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날아오는 공을 최대한 오래 바라보며, 방망이를 최대한 늦게 휘두른다.

공이 포수의 미트에 꽂히기 직전의 그 아슬아슬한 순간까지 기다릴 줄 알아야, 투구의 궤적을 정확히 판단하고 정타를 날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기다림의 기술’은 시각 정보 없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에게는 일상적인 생존 전략이다.

처음 방문한 공간에서, 손끝과 발끝으로 바닥의 질감과 벽의 거리를 재며 머릿속에 지도를 그리는 시간.

화면낭독기가 읽어주는 수많은 정보의 소음 속에서, 진짜 필요한 정보를 걸러내기 위해 잠시 호흡을 고르는 시간.

이 모든 ‘느림’은 무능함이 아니라, 더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위한 의도적인 정보 처리 지연(Information Processing Delay)이다.


정보학의 관점에서 보면, 현대 사회는 신호(Signal) 보다 소음(Noise)이 압도적으로 많은 시대다.

이런 환경에서 무작정 방망이를 휘두르는 것은 허공에 헛스윙만 날릴 뿐이다.

진짜 지혜는 쏟아지는 정보의 소음 속에서 진짜 ‘칠 만한 공’, 즉 유의미한 신호를 가려내는 능력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능력은 오직 ‘기다림’을 통해서만 길러진다.


‘더 빨리! 더 많이!’라고 외치는 시대가 왔지만, ‘어떤 일을? 어떻게?’라고 묻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덕목이 되었다.

속도와 효율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듯한 세상 속에서, 우리는 모두 각자의 타석에 서 있다.

날아오는 공을 향해 조급하게 방망이를 휘두를 것인가, 아니면 숨을 고르고 끝까지 기다려 결정적인 한 방을 날릴 것인가.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비하인드 스토리


며칠 전, 보보가 새로 나온 ‘블렌더’를 자랑했다.

“이거 10초면 토마토 주스가 된대!”

나는 ‘기다림의 미학’을 설파하며, 천천히 손으로 토마토를 갈기 시작했다.

10분이 지나도록 토마토는 즙이 될 생각이 없었고, 내 팔은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결국, 나는 묵묵히 블렌더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그렇다.

때로는 그냥 빠른 게 최고일 때도 있다.

철학도 배고픔 앞에서는 힘을 잃는다.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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