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닐라, 가장 달콤한 향에 숨겨진 쓴 역사

by 김경훈

늦여름의 볕이 기분 좋게 따가운 오후, 산책을 마치고 잠시 벤치에 앉았다.

컵에 담긴 바닐라 아이스크림 한 숟갈을 떠서 탱고의 입가에 가져다주자, 녀석의 꼬리가 맹렬한 속도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세상의 모든 행복이 하얗고 부드러운 그 한 숟갈에 응축된 듯, 탱고는 온 신경을 집중해 아이스크림을 핥는다.

그 순수한 기쁨의 표현을 보고 있자면, 바닐라라는 향이 가진 보편적인 위로의 힘을 실감하게 된다.

이처럼 순수하고 달콤한 행복의 상징.

하지만 이 향기 속에 제국주의와 노예제, 그리고 한 소년의 잊힌 천재성이라는 쓰디쓴 역사가 숨어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바닐라는 난초과 식물의 열매로, 원래 멕시코가 원산지이다.

멕시코에서는 멜리 포나(Melipona)라는 특정 종의 벌이 바닐라 꽃의 수정을 도맡아 자연적으로 열매를 맺게 한다.

하지만 다른 지역에는 이 벌이 살지 않았기에, 19세기 중반까지 멕시코 바깥에서 바닐라를 상업적으로 재배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 거대한 장벽을 허문 것은 프랑스령 레위니옹 섬에 살던 12살의 흑인 노예 소년, 에드몽 알비우스(Edmond Albius)였다.

1841년, 그는 가느다란 대나무 꼬치로 바닐라 꽃의 구조를 조작해 인공적으로 수정하는 놀랍도록 단순하고 효과적인 방법을 발견했다.


에드몽 알비우스는 포스트콜로니얼리즘(Postcolonialism) 연구에서 말하는 전형적인 ‘서벌턴(Subaltern)’의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 존재하여 목소리를 갖지 못했던 이.

그의 발견은 레위니옹 섬을 세계 최대의 바닐라 생산지로 만들었고 프랑스에 막대한 부를 안겨주었지만, 정작 그의 이름과 업적은 오랫동안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묻힐 뻔했다.

값비싼 천연 바닐라의 달콤함은 한 소년의 지적 재산권(Intellectual Property)이 무참히 착취된 토대 위에 세워진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18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에드몽이 발견한 방법보다 더 효율적인 기술이 개발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바닐라 꽃은 단 하루, 그것도 오전에만 피기 때문에 전 세계의 바닐라 농장에서는 지금도 수많은 노동자들이 일일이 손으로 꽃을 수정하고 있다.

이는 자연의 정교한 공생 관계가 인간의 욕망에 의해 다른 대륙으로 옮겨졌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주는 인류세(The Anthropocene) 시대의 축소판과도 같다.

우리는 자연의 시스템을 파괴하고, 그 빈자리를 누군가의 고된 육체노동으로 채워 넣고 있는 것이다.


이토록 까다롭고 노동 집약적인 과정 때문에 천연 바닐라는 향신료 중에서 샤프란 다음으로 비싸다.

결국 우리가 아이스크림이나 과자, 방향제에서 흔히 만나는 바닐라 향은 대부분 ‘바닐린(Vanillin)’이라는 합성 물질이다.

석유나 나무 펄프에서 추출한 값싼 합성 물질이 수많은 역사와 노동의 땀방울이 깃든 진짜 바닐라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아이스크림의 달콤함에 온전히 몰두하는 탱고의 모습을 본다.

이 순수한 존재에게 바닐라는 그저 행복한 맛일 뿐이다.

어쩌면 우리 역시 그 달콤함 뒤에 숨은 서늘한 역사를 애써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장 보편적이고 순수하다고 믿는 감각 속에, 가장 복잡하고 어두운 세계사가 깃들어 있다는 사실.

그 보이지 않는 간극을 들여다보고 잊힌 목소리를 기억해 내는 것, 그것이 이 달콤한 향기가 우리에게 남긴 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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