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강아지 이름은 ‘탱고’이지, ‘귀여워’가 아닙니다만

by 김경훈

안내견 탱고와의 산책은 목가적인 풍경화가 아니다.

그것은 온갖 돌발 변수로 가득 찬 리얼리티 서바이벌 쇼에 가깝다.

오늘의 빌런은 누구일까?

1번, 목줄 풀린 시한폭탄.

2번, 규칙은 알지만 나만 예외인 ‘내로남불’ 교육자.

3번, “사진 한 장만!”을 외치는 파파라치.

매일 아침, 긴장의 끈을 동여매고 이 예측 불가능한 쇼의 막을 올린다.


가장 흔한 빌런은 단연 ‘목줄 풀린 개’와 그 주인이다.

얼마 전에는 작은 개 한 마리가 탱고를 향해 맹렬히 돌진했다.

함께 걷던 보보가 막지 않았다면 큰일이 날 뻔했다.

하지만 가해 견주의 반응은 가히 코미디다.

“개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뭘 그래요?”

그렇다.

그에게 이 아찔한 상황은 책임져야 할 ‘사건’이 아니라, 잠시 구경하다 갈 ‘볼거리’에 불과하다.

그의 시선 속에서, 탱고는 동등한 생명이나 일하는 파트너가 아니라, 그저 신기한 구경거리로 대상화(objectification)될 뿐이다.


사람들의 반응은 더 복잡하다.

아이에게는 “안내견은 눈으로만 인사해야 해”라고 가르친다.

정작 본인은 “안녕, 탱고야!” 하고 우렁차게 말을 건다.

이 이중적 태도는 단순히 모순을 넘어, 규칙을 알면서도 스스로는 그 규칙의 예외라 여기는 일종의 인식론적 무지(epistemological ignorance)에서 비롯된다.


문득 억울해진다.

일반 반려견과 산책할 때도 사람들은 이토록 함부로 사진을 찍고 손을 대는가.

동의 없이 안내견을 촬영하는 행위는 그 대상이 동물이든 사람이든 권리를 침해하는 명백한 폭력이다.

‘귀엽다’는 감정이 모든 무례를 용서하는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결국 이 모든 상황은 하나의 역설로 귀결된다.

독립적인 이동을 가능하게 해주는 안내견이 오히려 불필요한 관심과 접촉을 끌어들이는 자석이 되어버리는 역설.

이는 장애를 개인의 신체적 손상이 아닌, 사회적 환경이 만들어내는 장벽으로 보는 ‘장애의 사회적 모델(Social Model of Disability)’을 명백히 보여준다.

진짜 장애물은 계단이나 턱이 아니라, 타인의 경계를 존중하지 않는 그릇된 ‘관심’과 ‘시선’인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예절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가 개인의 경계를 어떻게 존중하는지를 묻는 윤리(Ethics)의 문제다.

장애인의 보조기구나 특수견을 대할 때 필요한 것은 특별한 배려가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공공의식이다.

‘건드리지 않음’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형태의 존중이다.

안내견과의 산책길은 그래서 늘 우리 사회의 성숙도를 되묻는 시험지와 같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 시험의 정답률은 아직도 바닥 수준이다.



비하인드 스토리


며칠 전, 그토록 바라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온한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행인들은 젠틀했고, 다른 강아지들도 얌전했다.

바로 그 순간, 길가 빵집에서 갓 구운 소시지 빵 냄새가 흘러나왔다.

‘안내’라는 숭고한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탱고의 코가 미세하게 벌름거렸다.

다음 순간, 녀석은 하네스를 쥔 손을 이끌고 빵집 문 앞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렇다. 때로는 안내견의 가장 큰 적이 바로 빵집 아저씨일 때도 있다.

그날, 탱고의 저녁밥에는 소시지 빵 한 조각이 추가되었다.

나도 피자빵 하나 먹었다.

물론, 내 돈으로 샀다.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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