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물흐물한 정의, 종이 빨대에 대하여

by 김경훈

철학 박사 보보와의 대화는 언제나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튄다.

오늘의 주제는 ‘빨대’였다.

출근길 스타벅스 드라이브 스루에서 받아 든 종이 빨대 하나가 이토록 심오한 고찰로 이어질 줄이야.


사건의 발단은 며칠 전 마셨던 자몽 블랙티였다.

음료를 다 마시고, 마지막 한 방울까지 빨아들이려는데 무언가 건더기가 딸려왔다.

‘아, 과육이 남아있었군.’

의심 없이 오물오물 씹었다.

그런데 이 과육, 어딘가 이상하다.

질기고, 눅눅하고, 종이 맛이 난다.

그렇다.

그것은 과육이 아니라, 장렬히 전사한 종이 빨대의 시신 일부였다.


이 끔찍하고도 비극적인 경험은 ‘환경을 위한 불편함’이라는 숭고한 명제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한다.

환경을 위한다는 이 흐물흐물한 정의는 과연 옳은가?

종이를 가공하며 발생하는 환경오염과, 그 종이를 코팅하는 정체불명의 물질은 정말 괜찮은 건가?


보보는 이 현상을 ‘전시적 환경주의(Performative Environmentalism)’라고 명명했다.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보다, ‘우리는 환경을 생각하고 있다’는 제스처를 보여주는 데 급급한 행태라는 것이다.

그녀의 말처럼, 진정으로 환경을 생각했다면 빨대 없는 컵 뚜껑을 기본으로 제공하고, 꼭 필요한 사람(어린이, 노약자 등)에게만 옥수수 전분 같은 친환경 재질의 빨대를 선택적으로 제공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지 않았을까?


이는 사용자 경험(User Experience, UX) 디자인의 명백한 실패다.

어느 기업은 아기가 엄마의 모유를 빨 때의 안정감과 흡입력을 구현하기 위해 빨대의 직경과 길이를 설계했다는 말을 들었다.

이 얼마나 변태 같고도 위대한 사용자 중심 디자인(User-Centered Design)인가!

그에 반해, 음료의 맛을 해치고 끝내 스스로 분해되어 사용자의 입속으로 들어오는 종이 빨대는 사용자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도 없는 설계다.


결국 이 문제는 접근성(Accessibility)의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빨대가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종이 빨대는 편리한 도구가 아니라 또 다른 장벽이 된다.

흐물거리는 빨대로는 점성이 있는 음료를 마시기 어렵고, 뜨거운 음료에서는 금세 녹아버린다.


빨대 하나에 담긴 이야기는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설계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축소판이다.

겉으로 보이는 명분과 상징에만 집착한 나머지, 실제 사용자의 구체적인 경험과 불편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진짜 중요한 것은 플라스틱을 종이로 바꾸는 행위가 아니라, 애초에 빨대가 없어도 괜찮은 문화를 만드는 것이다.



비하인드 스토리


그날 저녁, 보보는 환경보호를 위해 구매했다는 거대한 스테인리스 빨대를 자랑스럽게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우아하게 요구르트 스무디를 빨아들였다.

바로 그 순간, 옆에서 졸고 있던 탱고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스테인리스 빨대가 컵에 부딪히며 내는 ‘쨍’ 하는 소리를, 간식을 주는 ‘땡땡이’ 종소리로 완벽하게 오해한 것이다.

그렇다.

하나의 기술은 사용자(개)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날, 탱고는 스무디 대신 닭가슴살 간식을 얻어먹었다.

나의 ‘환경 철학’은 탱고의 ‘조건반사’ 앞에서 처참히 패배했다. 흑흑.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제 강아지 이름은 ‘탱고’이지, ‘귀여워’가 아닙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