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쇼핑몰의 유령, 아베크롬비 피어스

by 김경훈

어두컴컴한 조명, 귀를 찢는 듯한 음악,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지배하던 단 하나의 향기.

2000년대 쇼핑몰의 제왕, 아베크롬비 앤 피치 매장의 추억은 후각에 고스란히 박제되어 있다.

오늘, 바로 그 시절의 지배자이자 유령인 ‘피어스(Fierce)’를 우연히 길에서 마주쳤다.

2025년의 거리에서 만난 그는 과연 어떤 모습일지, 짓궂은 동창생을 만난 기분으로 그를 뜯어보기로 했다.


이 친구는 모습보다 냄새로 먼저 자신의 등장을 알린다.

반경 10미터 안에 들어서자, 마치 시공간이 뒤틀리며 2000년대의 쇼핑몰 한복판으로 강제 소환된 듯한 착각이 든다.

그의 첫인사는 미식축구부 주장의 힘찬 어깨빵과 같다.

상큼한 레몬과 오렌지, 그리고 톡 쏘는 전나무(Fir)의 향기가 “내가 바로 피어스다!”라고 소리치며 주변의 모든 향기를 쫓아낸다.

이것은 향수가 아니라, 일종의 후각적 영토 표시다.


그와 잠시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의 진짜 성격이 드러난다.

놀랍게도 이 ‘상남자’의 심장에는 재스민, 장미, 은방울꽃 같은 섬세한 꽃들이 숨어있다.

하지만 이 꽃들은 수줍은 정원의 꽃이 아니라, ‘인기남의 체취’라는 목적을 위해 완벽하게 조율된, 일종의 화학 병기에 가깝다.

여기에 톡 쏘는 로즈마리가 더해져, 방금 샤워를 마치고 나온 듯한, 공격적일 만큼 깨끗한 비누 향을 완성한다.

그의 모든 향기는 “나는 이렇게 깔끔하고 인기 많은 남자야”라는 단 하나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복무한다.


대화가 끝나고 그가 떠난 뒤에도, 그의 존재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머스크와 오크모스, 베티버로 이루어진 그의 베이스 노트는 ‘방금 세탁한 옷’ 혹은 ‘잘나가는 남자 사람 친구의 차’에서 날 법한, 지극히 전형적이고 익숙한 향기를 남긴다.

이 향기는 그의 시그니처이자, 한 시대를 풍미했던 ‘피어스’라는 현상의 본질이다.

그는 떠났지만, 공기 중에는 여전히 그의 졸업 앨범 사진이 떠다니는 듯하다.


오랜만에 만난 피어스는 여전했다.

여전히 유쾌하고, 여전히 인기가 많고 싶어 하며, 여전히 온 세상에 자신의 존재감을 광고한다.

하지만 2025년의 시점에서 보니, 그의 이런 모습은 멋지다기보다 어딘지 모르게 짠하게 느껴진다.

한때는 세련됨의 극치였을지 몰라도, 이제는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복학생 오빠의 향기처럼 느껴진달까.


향기는 종종 시간 여행의 가장 확실한 매표소다.

피어스는 2000년대라는 특정 시간으로 떠나는 가장 빠르고 강렬한 티켓이다.

하지만 그 여행은 너무나 시끄럽고 정신이 없어서, 금방 현실로 돌아오고 싶게 만든다.

반가웠다, 친구.

하지만 이제 우리는 각자의 시대를 살아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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