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의 설계도

by 김경훈


1. 무지의 장막과 최초의 질문


최첨단 기술로 만들어졌다는 '말하는' 키오스크를 마주한 적이 있다. 음성으로 모든 것을 알려주겠다던 그 기계의 조작부는 아이러니하게도 아무런 요철 없는 매끈한 터치스크린이었다. 기계는 친절하게 떠들었지만, 그 목소리를 제어할 방법은 칠흑 같은 유리 표면 위에 숨어있었다. 이 웃지 못할 상황은 단순한 설계의 실수가 아니다. 그것은 세상을 만드는 자들이 던지지 않았던, 그러나 반드시 던져야만 했던 최초의 질문이 부재했음을 보여주는 완벽한 증거다. "만약 이 세상을 설계하는 당신이 내일 어떤 모습으로 태어날지 전혀 모른다면, 과연 어떤 세상을 만들 것인가?"


정치철학자 존 롤즈(John Rawls)는 이 질문을 '무지의 장막(Veil of Ignorance)'이라는 아름다운 사고 실험으로 구체화했다. 정의로운 사회의 원칙을 합의하기 위해, 우리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 재능, 그리고 심지어 신체적 조건까지도 모르는 원초적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장막 뒤에서 당신은 부자일 수도, 가난할 수도 있다. 천재일 수도, 평범할 수도 있다. 두 다리로 걷는 사람일 수도, 휠체어를 타는 사람일 수도, 혹은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이 장막 뒤에서 당신은 어떤 사회를 설계하겠는가? 아마도 당신은 '최소수혜자(the least advantaged)'에게 가장 유리한 사회를 만들 것이다. 왜냐하면 장막이 걷혔을 때, 당신 자신이 바로 그 최소수혜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롤즈의 정의론은 이처럼 추상적인 법이나 제도를 넘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물리적, 정보적 구조를 어떻게 설계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윤리적 설계도를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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