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 참으로 세련된 단어다. 마치 고급 레스토랑의 메뉴판에나 있을 법한 이름이지만, 그 실체는 눅눅한 반지하의 곰팡이처럼 끈질기고 음울하다. 광고기획사 나계산(羅計算) 과장은 요즘 그 번아웃이라는 곰팡이와 동거 중이었다. 그의 하루는 오후 네 시, 모니터의 푸른빛이 세상을 삼킬 때 시작되어 자정 너머, 도시의 네온사인이 피로에 절어 깜박일 때 끝났다.
그날 밤도 다르지 않았다. 머릿속은 광고주의 무리한 요구와 마감일이라는 두 개의 압력밥솥에 짓눌린 밥처럼 질척거렸다. 퇴근 후 그는 으레 걷던 큰길 대신 공동묘지를 가로지르는 지름길을 택했다. 그의 머릿속 계산기는 정확했다. ‘이 길로 가면 정확히 10분 단축. 10분이면 유튜브 쇼츠를 20개는 볼 수 있는 시간이지.’ 그의 얼굴엔 어떤 감정도 없었다. 회색빛 도시에 사는 회색빛 양복을 입은 회색빛 표정의 사내. 그게 나계산이었다.
달이 유난히 밝았다. 은박지를 구겨놓은 듯한 달빛이 묘비들 위로 서늘하게 쏟아져 내렸다. 이 빠진 옥수수처럼 드문드문 솟은 묘비들은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고, 공기는 축축하고 싸늘했다. 하지만 나계산에게 공포는 사치였다. 그는 몇 번이고 이 길을 걸었고, 죽은 자들은 산 자만큼 귀찮게 굴지 않는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가 몰랐던 것은 딱 하나. 오늘 낮, 묘지 인부들이 새 주인을 맞을 집을 파놓았다는 사실이었다. 익숙하게 발을 내딛는 순간, 그의 발밑에서 땅이 사라졌다. “억!” 하는 짧은 비명과 함께 그의 몸은 중력에 이끌려 어둠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차갑고 축축한 흙바닥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사방은 완벽한 직사각형의 흙벽이었다. 그의 키를 훌쩍 넘는 갓 파낸 무덤 구덩이였다. 처음엔 당황했다. 하지만 곧 그의 ‘계산기’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일어나 벽을 짚고 뛰어올랐다. 손톱 밑으로 흙이 끼어들고 바짓가랑이가 찢어졌지만, 그의 몸은 번번이 미끄러져 아래로 처박혔다.
시도 1회, 실패. 점프 높이 부족.
시도 2회, 실패. 흙벽의 마찰력 계산 착오.
시도 3회, 실패. 체력 안배 실패.
서너 번의 필사적인 시도 후, 나계산 과장은 결론을 내렸다. ‘불가능.’ 벽은 너무 높고 가팔랐다. 도움 없이는 절대 나갈 수 없다. 그는 더 이상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이 가장 ‘효율적인’ 선택이었다. 그는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아침이 오기를, 누군가 자신을 발견해 주기를 기다렸다. ‘존버’는 직장인에게 주어진 유일한 필살기 아니었던가. 그는 아늑한 절망의 자궁 속에서 스르르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으아악!” 하는 요란한 비명과 함께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고요를 깼다. 나계산은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깼다. 그의 옆으로 시큼한 술 냄새를 풍기는 거구의 사내가 대(大) 자로 뻗어 있었다. 바로 이 동네의 명물, 주취락(朱醉樂) 씨였다. 그는 이름처럼 술에 취해 즐거워하는 것이 인생의 낙인 사내였다.
주취락 씨는 잠시 끙끙 앓더니,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파악하고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다짜고짜 벽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나계산이 이미 ‘불가능’이라고 결론 내렸던 바로 그 행위를, 그는 짐승 같은 기세로 반복했다. “크어어!” 하는 괴성을 지르며 벽을 타고 오르려다 미끄러지고, 다시 일어나 돌진하다가 넘어지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계산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는 이미 정답을 아는 인생 선배의 너그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저씨, 소용없어요. 제가 다 해봤습니다. 여긴 못 나가요. 그냥 아침까지 기다리시죠.”
그것은 합리적인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친절한 조언이었다. 하지만 술에 취한 주취락 씨의 귀에는 다르게 들렸다. 그는 휙 고개를 돌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나계산을 노려봤다. 그의 취한 눈에, 나계산은 자신을 방해하는 ‘무덤 속의 원혼’으로 보였을 것이다. 주취락 씨의 얼굴이 공포로 하얗게 질렸다.
“흐익! 귀, 귀신이다!”
그는 갑자기 폐활량을 200% 끌어올린 듯한 괴성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아아!”
그리고는 방금 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폭발적인 힘으로 흙벽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그의 손이 미친 듯이 흙벽을 파고들었고, 발은 벽을 차고 또 찼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그의 손이 구덩이 가장자리를 움켜쥔 것이다. 그는 단숨에 몸을 끌어올리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비명을 지르며 묘지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순식간에 구덩이에는 다시 정적과 나계산만이 남았다. 그는 멍하니 주취락 씨가 사라진 위쪽을 바라보았다. 머릿속 계산기가 고장 난 듯 삐걱거렸다.
‘불가능했는데... 분명히 불가능하다고 계산했는데...’
그때 깨달았다. 주취락 씨는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데이터를 몰랐다. 그는 그저 ‘나가야 한다’는 단 하나의 목표만 있었을 뿐이다. 나계산을 가둔 것은 높고 가파른 흙벽이 아니었다. ‘이것은 불가능하다’는 너무 빨리, 너무 똑똑하게 내려버린 자신의 결론이었다.
나계산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방금 주취락 씨가 튀어나갔던 벽을 다시 바라보았다. 똑같은 벽이었지만, 어쩐지 아까보다 조금 낮아 보였다. 그는 다시 한번 벽을 향해 몸을 날렸다. 주취락 씨가 파놓은 희미한 손자국을 짚고,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나무뿌리를 발로 밟았다. 손톱이 부러지고 무릎이 까졌지만, 그는 마침내 차가운 밤공기가 느껴지는 구덩이 밖으로 기어 나올 수 있었다.
우리 대부분은 나계산 과장처럼, 너무 일찍, 너무 똑똑하게 포기해 버린다. 자신의 경험과 데이터를 근거로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라며 스스로를 절망의 구덩이 안에 가둔다. 하지만 세상에는 가끔 주취락 씨처럼, 그 똑똑한 계산 따위는 모르는 채 무작정 부딪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이 불가능의 벽을 넘어설 때, 우리는 가장 값비싼 인생 과외를 받게 된다.
당신을 가두는 것은 구덩이가 아니라, ‘이건 안돼’라고 선을 그어버린 당신의 똑똑한 머리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가끔은 머리가 아닌 몸으로 부딪쳐볼 일이다. 당신의 구덩이에도, 술 취한 인생 과외 선생님이 떨어질지 누가 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