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샌드위치였다
“여보, 오늘 저녁은 그냥 햄버거 어때?”
아내의 한마디에 내 머릿속에서는 거대한 미식 월드컵 대진표가 펼쳐졌다. 파이브 가이즈, 인앤아웃, 쉑쉑버거. 뇌세포들이 각자 선수의 유니폼을 입고 열띤 토론을 시작하는 지극히 소모적이고 낭만적인 프로세스다.
“음… 파이브 가이즈가 당기네.”
이름만으로도 입안에 기름진 행복이 감도는 그곳. 유학 시절, 나는 파이브 가이즈의 광신도였다. 체스판처럼 깔린 빨갛고 하얀 타일 바닥, 주문과 동시에 쏟아져 나오는 산더미 같은 감자튀김, 그리고 무엇보다 매장 한편에 전리품처럼 쌓여 있던 거대한 땅콩 포대자루. 무료라는 관대함에 신이 나, 종이봉투에 땅콩을 한가득 퍼 담으며 버거를 기다리던 그 순간의 공기는 고소함과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은박지에 투박하게 싸인 버거를 한입 베어 물면, 진한 육즙과 녹진한 치즈가 ‘이것이 미국이다’라고 외치는 듯했다. 그래, 내 유학 시절의 소울 푸드는 단연코 파이브 가이즈였다.
“아니, 잠깐만.”
내 회상에 스스로 태클을 걸었다. 뇌의 데이터베이스가 오류를 수정하며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가장 사랑한 버거’와 ‘가장 많이 먹은 음식’은 엄연히 다른 카테고리라는 지적이었다. 가슴 아프지만 팩트였다. 고된 유학 생활 동안 내 텅 빈 지갑과 허기진 배를 가장 자주 채워준 것은 파이브 가이즈의 화려한 버거가 아니었다. 그것은 서브웨이의 터키 샌드위치였다.
점심시간이면 나는 주문 기계처럼 읊조렸다. “터키 샌드위치, 위트 브레드에, 야채는 전부, 소스는 스위트 어니언으로요.” 그건 내게 선택이 아닌 루틴이었고, 맛이 아닌 생존이었다. 파이브 가이즈가 고된 한 주를 버텨낸 나에게 주는 ‘셀프 보상’이었다면, 서브웨이는 그 고된 하루하루를 버티게 해 준 ‘필수 영양소’였다.
하지만 샌드위치는 햄버거가 아니다. 이건 마치 축구 경기에서 손을 쓴 마라도나처럼 반칙이다. 나는 이 논쟁에서 서브웨이를 실격 처리하고, 내 마음속 1위 자리를 파이브 가이즈에게 굳건히 돌려주었다. 이런 걸 자기 합리화라고 하던가. 뭐, 어떠랴. 추억이란 본디 내 입맛대로 각색하는 재미가 있는 법이다.
물론 다른 강자들도 있었다. 캘리포니아의 햇살처럼 신선하고 정직했던 인앤아웃. 비밀 메뉴인 ‘애니멀 스타일’을 주문하며 현지인이라도 된 듯 으쓱했던 기억. 뉴욕의 활기찬 공원에서 먹었던 쉑쉑버거의 그 녹진한 치즈 맛. 그건 버거의 맛이라기보다, 그 도시의 분위기를 함께 먹는 경험에 가까웠다.
“그래서 뭐 시킬 건데? 당신 햄버거 박사님.”
내 길고 긴 사색을 깬 것은 역시 아내였다. 그녀는 내 복잡한 미식 철학을 단 한 문장으로 정리해 버리는 놀라운 재능이 있다.
“생각 좀 해봤는데… 내 인생의 최애는 파이브 가이즈였지만, 나를 먹여 살린 건 사실 서브웨이였어. 근데 서브웨이는 햄버거가 아니니까, 결국 내 최애는 파이브 가이즈가 맞는 거지.”
아내는 잠시 나를 쳐다보더니, 특유의 그윽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렇네. 당신을 가장 설레게 한 사람과, 당신 곁을 가장 오래 지켜준 사람은 다른 거구나.”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멍해졌다. 햄버거 이야기에서 시작된 시시껄렁한 잡담이 아내의 한마디에 인생의 본질을 꿰뚫는 철학적 문장이 되어버렸다.
그렇다. 내 인생은 화려한 ‘파이브 가이즈’의 순간들로 기억될지 모른다. 하지만 그 빛나는 순간들을 위해, 묵묵히 내 곁을 지키며 에너지가 되어준 것은 담백한 ‘서브웨이’ 같은 일상이었다. 그리고 내 곁에서 이 모든 이야기를 들어주며 고개를 끄덕이는 아내야말로, 내 인생 최고의 ‘서브웨이 터키 샌드위치’가 아닐까.
나는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아내를 바라보았다.
“여보. 그냥 롯데리아 갈까? 가서 새우버거 먹자.”
내 제안에 아내는 환하게 웃었다. 결국 우리의 저녁 메뉴는 미국 본토의 쟁쟁한 후보들을 모두 제치고, 한국인의 소울 버거, 롯데리아 새우버거로 결정되었다. 타르타르소스가 듬뿍 발린 새우 패티를 한입 베어 무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인생 최고의 맛이란, 결국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과 함께 웃으며 먹는 맛이라는 것을. 가끔은 맥도날드 치즈버거의 단순한 맛이 그리울 때도 있겠지만, 오늘은 이 새우버거가 정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