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될 수 있다
좋아하는 걸로 ‘우리’가 되기엔 세상은 너무 넓고 취향은 제각각이다. 누군가의 인생 영화가 내게는 수면제일 수 있고, 누군가의 최애 아이돌이 내게는 그저 소음 공해일 수 있다. ‘좋아요’라는 공감대는 생각보다 얕고 헐거워서 작은 취향 차이 하나에도 쉽게 끊어지곤 한다.
하지만 싫어하는 걸로 ‘우리’가 되는 건, 의외로 간단하고 강력하다. 싫어하는 감정의 뿌리는 대개 더 깊고 본능적이라, 나와 같은 것에 분노하고 같은 것에 고개를 젓는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마치 비밀 동맹이라도 맺은 듯 끈끈한 유대감을 느낀다. 이것은 내가 지긋지긋한 회사 워크숍에서 평생의 친구를 얻게 된 이야기다.
그날, 우리는 ‘하나 된 열정, 위대한 도약!’이라는 촌스러운 슬로건이 내걸린 리조트 세미나실에 갇혀 있었다. 창밖으로는 주말의 뭉게구름이 유유히 흘러갔지만, 창 안의 공기는 stale coffee 냄새와 억지 미소, 그리고 ‘나는 지금 여기에 왜 있는가’ 하는 실존적 고뇌로 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특히 내 신경을 긁는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옆자리의 박력찬(朴力讚) 대리였다. 그는 이름처럼 온몸에서 과시적인 활력이 넘치는 사내였다. 모두가 영혼 없는 표정으로 앉아 있을 때, 그는 혼자 샛노란 맨투맨을 입고 와서는 시종일관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강사의 말에 추임새를 넣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이 고통스러운 워크숍을 긍정하는 듯해서 나는 속으로 그를 ‘워크숍의 앞잡이’라 부르며 경멸했다.
고통의 정점은 ‘비전 풍선 날리기’라는 해괴한 프로그램에서 찾아왔다. 강사 오글아(吳글아) 씨는 혀가 반쯤 녹아내린 듯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풍선과 매직을 나눠주었다.
“자, 여러분~! 이 풍선에 우리 팀의 시너지를 담은 꿈과 비전을 적어서 저 푸른 창공으로 함께 날려 보내는 거예요~!”
나는 ‘집에 가고 싶다’는 여섯 글자를 꾹꾹 눌러썼다가 혹시나 인사고과에 반영될까 싶어 황급히 지웠다. 대신 ‘성공적인 프로젝트 완수’라는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는 문장을 적어 넣었다. 그때, 무심코 옆자리를 쳐다본 나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늘 에너지가 넘치던 박력찬 대리가 아주 찰나의 순간, 강사를 향해 미간을 찌푸리며 입 모양으로 ‘지랄’이라고 말하는 것을 본 것이다. 그리고 그가 든 파란색 풍선 하단, 아주 작은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로또 1등 당첨’. 그의 위대한 비전은 회사와의 시너지가 아니라, 회사로부터의 완벽한 탈출이었다.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1초. 2초.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이 해괴한 상황과 저 꼴 보기 싫은 강사를 함께 싫어하고 있다는 완벽한 공감대 속에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짧은 눈 맞춤과 끄덕임 속에서 우리는 이미 ‘전우’가 되어 있었다. 좋아하는 가수가 같다는 이유로 친해진 그 어떤 팬클럽 동료보다도 훨씬 더 끈끈한 동지애였다.
워크숍이 끝나고, 우리는 담배도 피우지 않으면서 약속이라도 한 듯 건물 뒤편의 흡연 구역에서 만났다. 어색한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박 대리였다.
“하… 진짜… 오글거려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의 얼굴에서 과장된 활력은 사라지고, 나와 같은 종류의 깊은 피로감이 서려 있었다.
“저도요. 특히 비전 풍선은… 정말이지 최악이었습니다.”
그 한마디가 기폭제가 되었다. 우리는 마치 10년 지기 친구처럼 강사 오글아 씨의 콧소리와 촌스러운 옷차림, ‘시너지’라는 단어를 남발하는 끔찍한 말투에 대해 신랄한 뒷담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우리는 서로의 취미나 좋아하는 영화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오직 우리가 얼마나 이 워크숍을 증오했는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을 뿐인데도,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좋아요’는 개인의 취향이지만, ‘싫어요’는 종종 가치관의 공유다. 비효율을 싫어하고, 억지 감동을 싫어하고, 가식을 싫어하는 것은 그 사람이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주는 선명한 증거다. 박력찬 대리는 활기찬 사람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활기찬 척을 해야 했던 ‘프로 직장인’이었고, 나 또한 그와 다르지 않았다.
결국 누군가와 진짜 ‘우리’가 된다는 것은 서로의 플레이리스트를 공유하는 것보다, 함께 욕할 ‘공공의 적’을 발견하는 그 짜릿한 순간에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날 이후, 나와 박 대리는 회사에서 가장 친한 동료가 되었다. 우리는 여전히 서로의 최애 가수가 누군지는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우리 둘 다 민트초코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가끔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