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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기획서는 어째서 지옥으로 가는가?

코브라 효과에 대하여

by 김경훈


나는 세상을 구하고 싶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야근과 주말 출근이라는 괴물에게 영혼을 저당 잡힌 우리 팀 동료들을 구하고 싶었다. 기획팀 신입사원 선한길(宣韓吉). 내 이름처럼, 나는 선한 의지로 가득 찬 열혈 청년이었다. 그리고 모든 비극은 대개 그런 눈부시게 선한 의지에서 출발하는 법이다.



1. 내 동료를 위한 ‘칼퇴 보너스’


우리 팀의 사무실은 해가 지면 더욱 빛나는 곳이었다. 모니터 불빛으로. 저녁 6시가 되면 사무실은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라는 비장한 정적에 휩싸였다. 좀비처럼 퀭한 눈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는 동료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결심했다. 이 비효율과 불행의 굴레를 내 손으로 끊어내리라.


나는 밤새 ‘혁신적 워라밸 증진을 위한 인센티브 제도’라는 거창한 제목의 기획서를 썼다. 내용은 간단했다. 정시에 퇴근하는 직원에게 ‘칼퇴 보너스’ 포인트를 지급하는 것. 포인트는 연말에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었다. 명분은 확실했고, 논리는 명쾌했다. 보상이 있다면, 행동은 변할 것이다.


팀장님은 내 기획안을 보고 “선한길 씨, 아주 스마트해!”라며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내 얼굴은 뿌듯함으로 발갛게 달아올랐다.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야근의 생태계를 파괴할 구원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리고 정책이 시행된 첫 주, 정말로 기적이 일어났다. 저녁 6시 정각이 되자, 사무실의 모든 불이 꺼졌다. 나는 텅 빈 사무실에 서서 내가 만든 이 완벽한 시스템에 스스로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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