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거나 먹는다는 것

by 김경훈

"점심 뭐 먹을까"

누군가 툭 던진 그 다정한 한마디가 때로는 거대한 질문처럼 다가온다.

그 질문 앞에서 나는 오늘도 괜찮은 척 미소 지으며 "아무거나요"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단순한 메뉴 선택을 넘어 복잡한 판단의 연속으로 가득하다.

나의 선택은 단순한 기호의 문제가 아니라, 환경과 조건, 그리고 타인의 시선까지 함께 고려해야 하는 조율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개인의 기호를 넘어선, 사회적 맥락 안에서 이루어지는 ‘제약된 선택’이다.


예를 들어 생선구이 식당은 조용히 나의 목록에서 지워진다.

시각장애인에게 생선은 가시라는 예리한 장벽으로 다가온다.

손끝과 혀끝의 감각만으로 날카로운 가시를 찾아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고 위험하다.

동행인이 가시를 제거해 주는 배려를 해준다고 해도, 느린 손놀림이나 반복되는 도움 요청은 정서적 부담감을 유발한다.

결국 생선의 풍미를 온전히 즐기기보다는 관계를 해치지 않기 위한 방어적 먹기가 시작된다.

보이지 않는 가시는 실제의 물리적 장벽이자, 관계의 긴장을 불러오는 정서적 장벽이다.


반찬이 다양하게 나오는 한정식 식당 역시 심리적 피로감을 유발한다.

시각적으로는 화려한 식탁이지만, 모든 반찬의 종류와 위치를 파악하고 기억하는 일은 인지적 에너지를 크게 소모한다.

동료가 옆에서 위치를 알려줘도 그것을 머릿속에 일종의 지도처럼 구성하고 유지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결국 눈앞의 두세 가지 반찬만을 선택하게 되고, 이는 식사 경험을 축소시키는 동시에 사회적 소외를 초래한다.

함께 있는 자리에 있지만, 나는 점점 그 식탁의 중심에서 벗어나게 된다.


직접 고기를 구워 먹는 식당은 더 복잡한 도전으로 다가온다.

불판 위 고기의 익는 정도를 감각만으로 판단하기 어렵고, 집게와 가위를 사용하는 고기 조리 과정은 섬세한 손의 감각과 협응을 필요로 한다.

결국 이 모든 과정을 동행인이 대신하게 되고, 나는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한다.

같이 음식을 먹으러 왔지만, 요리하고 나눠주는 역할이 한쪽으로만 집중된 상황은 식사의 본질을 흐리게 만든다.

이런 불균형은 단순한 배려를 넘어선, 식사 주체로서의 역할을 박탈당하는 경험이다.


이 모든 장면은 장애의 본질이 개인의 능력 부족이 아니라 사회적 설계와 인식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우리는 여전히 음식 문화를 시각 중심으로 설계하고 있으며, 이러한 구조는 시각장애인의 외식 경험을 제약한다.

이는 ‘미식의 에이블리즘’이라 부를 수 있는 구조적 무관심의 단면이다.

단순히 점자 메뉴판을 제공하는 것을 넘어, 조리 방식의 다양화, 접근 가능한 음식 구성, 그리고 종업원의 보조 방식에 대한 인식 개선까지 통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그저 모두와 함께 식사의 즐거움을 나누고 싶을 뿐이다.

외식이란 단지 배를 채우는 행위가 아니라, 관계를 맺고 이야기를 나누는 소중한 사회적 경험이다.

"아무거나요"라는 말 뒤에 숨어 있는 복잡한 판단과 타협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나은 식사 문화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은 독백이 그 상상의 출발점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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