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가방을 꾸릴 때면, 설렘보다 먼저 계산이 앞선다.
행선지까지의 거리, 소요 시간, 그리고 그 안에 내가 무엇을 먹고 마실지에 대한 치밀한 시뮬레이션.
나의 이 계획은 맛집 탐방이나 미식의 즐거움과는 거리가 멀다.
이것은 생리현상이라는 지극히 기본적인 욕구를 통제하기 위한 처절한 '자기 규율(Self-Discipline)'의 과정이다.
이동과 여행의 자유는 흔히 보편적 권리로 여겨지지만, 나에게 그 자유는 '화장실 문제'라는 보이지 않는 족쇄에 단단히 매여 있다.
모든 문제의 시작은 음식 섭취에 대한 두려움이다.
나는 장거리 이동 전, 특히 낯선 장소로의 여행을 앞두고서는 의식적으로 음식과 음료 섭취를 최소화한다.
이는 단지 소식을 지향하는 개인의 취향 문제가 아니다.
예측 불가능한 시점에서 찾아올지 모르는 생리적 신호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려는 예방적 조치다.
공중화장실이라는 '환경적 장벽(Environmental Barriers)'앞에서, 나는 먹고 마시는 기본적인 생명 활동마저 스스로 검열하게 된다.
이는 비장애인의 신체를 기준으로 설계된, 즉 '정상성(Able-bodiedness)'을 전제로 구축된 사회시스템이 개인에게 강요하는 비가시적인 통제다.
기차 여행은 낭만적이지만, 긴장의 연속이다.
복도를 지나 화장실에 도착하는 과정부터가 하나의 과업이다.
혹여나 누군가와 부딪힐까, 덜컹이는 열차 안에서 균형을 잃을까, 모든 감각을 곤두세워야 한다.
어렵사리 화장실 문 앞에 도착해도 긴장은 끝나지 않는다.
사용 중 표시를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없기에, 문을 두드려야 하는 매 순간은 타인의 공간을 침범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동반한다.
볼일을 마치고 다시 좌석으로 돌아가는 길은 또 다른 미로다.
머릿속에 구축해 둔 '인지적 지도(Mental Map)'가 정확한지 몇 번이고 되뇌며, 행여나 다른 사람의 자리에 앉게 될까 심장이 뛴다.
일상의 공간도 예외는 아니다.
지하철을 타고 가거나 길을 걷다가 갑작스럽게 신호가 올 때의 막막함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하기 어렵다.
주변 사람들에게 화장실의 위치를 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설사 위치를 안내받는다 해도 그곳까지 혼자 찾아가는 과정은 수많은 '공간인지(Spatial Cognition)' 능력을 요구하는 험난한 여정이다.
상가 건물의 복잡한 구조 속에서 화장실 표지판을 '읽을' 수 없는 나는, 문명의 이기를 바로 앞에 두고도 원시적인 공포와 싸워야 한다.
운 좋게 화장실 칸에 들어섰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 관문이 남았다.
용무를 본 후 물을 내리는 버튼을 찾는 일.
최근의 화장실들은 디자인을 중시한 나머지, 버튼의 형태와 위치가 제각각이다.
벽에 매립된 센서 방식이거나, 발로 밟는 형태이거나, 심지어 레버의 모양도 다양하다.
제한된 시간 안에 손으로 더듬는 '촉각적 탐색(Haptic Exploration)'만으로 이 미션을 완수하지 못했을 때의 당혹감과 민망함은 나를 더욱 위축시킨다.
먹고, 이동하고, 배설하는 이 기본적인 삶의 순환 고리가 누군가에게는 이토록 복잡하고 불안한 과업의 연속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사회는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나의 이 두려움은 지극히 사적인 문제인 동시에, 가장 공적인 공간 설계의 실패가 낳은 결과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