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뇌는 게으른 폭군이다. 최소한의 에너지로 최대한의 안정을 유지하려는 본능에 지배당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익숙한 것을 사랑하고, 반복되는 것을 신뢰하며, 편안한 것을 진리라 착각한다. ‘인지적 편안함’이라는 이름의 이 달콤한 마취제는 21세기의 가장 강력한 아편이다. 우리는 기꺼이 사유를 외주화 하고, 그 안락함 속에서 서서히 잠겨 들어간다. 권력이 가장 사랑하는 인간형, 즉 생각하지 않는 인간, ‘호모 브레인오프(Homo Brain-off)’의 시대가 그렇게 도래한다. 이것은 그 안락한 질식사에 대한, 어느 시각장애인 연구원의 감각적 보고서다.
1. 이방인의 침투
그날 오후, 김경훈은 자신의 영역이 아닌 곳에 앉아 있었다. 사회학과에서 주최한 ‘인지와 사회’라는 주제의 특강. 그의 발치에 엎드린 안내견 탱고의 평온한 숨소리만이 이 낯선 공간에서 유일하게 익숙한 것이었다. 강의실은 낡은 책의 먼지와 젊은 지성의 열기, 그리고 희미한 커피 향이 뒤섞인, 복잡하고도 생기 있는 냄새로 가득했다.
단상 위에서는 박민준이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한때 ‘행복 큐레이션’이라는 꼬리를 좇다 좌절했던 그는 이제 강사라는 새로운 페르소나를 입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야심에 차 있었지만, 이전의 날카로움 대신 학생들의 호응을 유도하는 능숙한 부드러움이 묻어 있었다.
“자, 여러분. ‘카디르가(kadirga)’.”
민준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지자, 강의실의 공기가 미세하게 변했다. 김경훈은 그 변화를 피부로 느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낯선 소리. 그것은 날카롭고 각진 유리 파편처럼 학생들의 고막에 박혔다. 김경훈은 옆자리의 누군가가 불편한 듯 헛기침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의 뇌 역시 ‘인지적 긴장’이라는 경고등을 켰다. 이 낯선 침입자는 누구인가.
“한 번 더 들어볼까요? ‘카디르가’.”
민준은 마치 미숙한 조련사처럼, 청중을 길들이려 했다. 김경훈은 눈을 감았다. 시각 정보가 차단된 그의 세계에서 ‘카디르가’라는 단어는 순수한 소리의 형태로 존재했다. 아직은 거칠고, 위협적이었다.
“이번엔 다른 단어입니다. ‘사리직(saricik)’.”
또 다른 이방인이 침투했다. 하지만 민준이 로버트 자이온스의 실험을 설명하며 그 단어들을 반복적으로 들려주자, 기묘한 변화가 일어났다. 김경훈은 자신의 내면에서 그리고 강의실 전체에서 저항이 서서히 잦아드는 것을 느꼈다. 날카롭던 소리의 모서리가 닳아 둥글어지고, 낯설었던 음절들은 점차 주머니 속의 익숙한 조약돌처럼 매끄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학생들의 키보드 소리가 다시 경쾌해졌고, 누군가는 나지막이 그 단어를 따라 읊조리기까지 했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사람들은 더 자주 들은 단어에 명백한 호감을 보였습니다. 반복은 안전하다는 신호이고, 안전한 것은 좋은 것이니까요! 우리의 뇌는 본능적으로 편안한 것을 선택합니다.”
민준의 목소리가 승리에 찬 어조로 울려 퍼졌을 때, 김경훈은 희미한 우울감을 느꼈다. 그는 지금, 하나의 진리가 어떻게 길들여지고 마침내 사랑받게 되는지에 대한,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세뇌 과정을 목격한 참이었다. 튀르키예어 단어는 죄가 없었다. 죄가 있다면, 그것을 무해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우리 뇌의 게으른 관성에 있었다.
2. 디지털 콜로세움의 포식자
강의가 끝나고 그는 탱고와 함께 교정을 걸었다. 가을의 끝자락, 캠퍼스는 온갖 소리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것은 자연의 소리가 아니었다. 학생들의 스마트폰이 뿜어내는 디지털 유령들의 불협화음이었다. 15초짜리 동영상의 중독적인 배경음악, SNS 알림음, 게임 효과음. 그것들은 모두 달랐지만, 기이할 정도로 똑같은 목적을 가졌다. 주의력을 낚아채고, 사유를 마비시키고, 더 강한 자극을 갈망하게 만드는 것.
그는 주머니에서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냈다. 화면낭독기가 무자비한 속도로 정보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어젯밤 그가 검색했던 논문의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또 다른 논문들, 그의 정치적 성향을 간파하고 보내온 자극적인 헤드라인의 뉴스 기사들, 그의 소비 패턴을 분석해 제안하는 맞춤형 광고들.
이것은 현대판 콜로세움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가장 교활한 포식자는 사자나 검투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알고리즘’이었다. 로마의 황제가 검투사의 피로 대중을 취하게 했다면, 알고리즘은 ‘인지적 편안함’이라는 이름의 빵과 서커스를 무한히 제공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우리가 이미 아는 것, 동의하는 것, 좋아하는 것만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새로운 튀르키예어 단어에 대한 경계심을 무너뜨리듯, 우리의 비판적 사고를 무장 해제시킨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굳게 닫힌 입술은 그의 내면에 이는 차가운 분노를 암시했다. 우리는 생각과 기억마저 챗GPT라는 유능한 집사에게 외주를 준다.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생각하기를 멈춘 군중. ‘호모 브레인오프’. 이보다 더 권력자에게 매력적인 인간형이 또 있을까. 탱고가 그의 손을 부드럽게 핥았다. 녀석은 그의 불안을 감지한 모양이었다.
3. 원로원의 저항
그의 연구실은 침묵과 질서의 성채였다. 탱고가 제자리에 눕는 소리, 컴퓨터의 저주파음, 그리고 그가 조작하는 키보드의 기계음만이 그 공간의 유일한 소리였다. 그는 지금, 디지털화된 어느 고문서(古文書)의 판본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기술의 부족으로 조악하게 스캔된 텍스트는 군데군데 끊겨 있었고, 화면낭독기는 의미 불명의 기호들을 토해내며 계속 오류를 일으켰다.
이것은 극심한 ‘인지적 긴장’을 요구하는 작업이었다. 모든 감각을 동원해 깨진 데이터의 조각을 맞추고, 맥락을 추론하며, 보이지 않는 텍스트의 원형을 복원해야 하는 고독한 노동. 이 순간, 그는 행복하지 않았다. 편안하지도 않았다. 그는 다만, 한 명의 연구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잠시 작업을 멈추고,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원로원 의원 그라쿠스가 코모두스 황제를 보며 내뱉던 그 냉소적인 독백. ‘코모두스는 로마를 움직이는 것이 원로원이 아니라 바로 저 콜로세움이라는 걸 알고 있지. 그는 로마에 죽음을 바칠 테고, 로마는 그를 사랑하게 될 거야.’
김경훈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그렇다. 권력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대중을 생각하지 않게 만드는 것. 튀르키예어 단어에 무해한 호감을 느끼게 하는 그 작은 심리적 기제가 거대한 선전과 프로파간다의 엔진이 되어 세상을 움직인다. 생각하기를 멈춘 대중은 그들에게 가장 편안한 거짓말을 들려주는 폭군을 가장 열렬히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는 다시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이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작업. 이것은 단순한 고문서 복원이 아니었다. 이것은 ‘호모 브레인오프’의 시대를 향한, 그의 작고 완강한 저항이었다. 그는 엉망인 코드 더미 속에서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으려는 한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 있었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그는 깨진 문장의 마지막 조각을 맞추는 데 성공했다. 화면낭독기가 조금은 지친 듯한 기계음으로, 복원된 고대의 문장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는 의자에 등을 깊게 기댄 채,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굳어 있던 얼굴 근육이 비로소 부드럽게 풀렸다. 이 작은 승리의 순간, 이 고통스러운 사유의 끝에서 얻은 희미한 안도감.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그 편리하고 안락한 질식사 대신 선택해야 할, 유일하고도 가장 인간적인 해독제인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