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안나 레우니스, feat. 마봉 드 포레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히 망막에 맺힌 상(像)을 뇌가 인식하는 물리적 과정일 뿐일까. 어쩌면 진정한 ‘봄’이란, 감각 정보를 해석하고, 재구성하며, 그 안에서 자신만의 의미와 맥락을 발견하는 지적인 행위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가장 완벽한 ‘봄’은 역설적으로, 시각이라는 가장 강력하고 폭력적인 감각이 차단된 상태에서야 비로소 가능한 것은 아닐까.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시각적인 예술인 ‘춤’을, 눈이 아닌 다른 감각으로 읽어내려 한 한 남자에 대한, 그리고 그 기묘한 해석의 과정을 기록한 어느 냉소적인 비평가에 대한 이야기다.
1. 비평가의 두 번째 질문
늦가을의 비가 대구의 아스팔트 위를 검게 적시던 저녁, 김경훈의 연구실 문을 두드린 것은 마봉 드 포레였다. 가죽 재킷에서 빗물을 툭툭 털어내는 그녀의 모습은 이 고요하고 정적인 공간에 침입한 이질적인 야생동물 같았다. 그녀의 입가에는 언제나처럼, 세상의 모든 것에 통달했다는 듯한 냉소적인 미소가 걸려 있었다.
“지난번엔 소리로 지옥을 보여드렸으니,” 그녀가 말했다. 바삭거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연구실의 정적에 미세한 균열을 냈다. “오늘은 빛으로 천국을 보여드릴까 해서요, 작가님.”
그녀는 노트북을 꺼내 그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의 손톱은 짙은 와인색이었고, 움직임은 불필요한 망설임이 없었다. 김경훈은 유쾌하게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는 공간의 서늘함을 조금쯤 덥혀주었다. 그의 창백하고 지적인 얼굴 위로, 호기심이라는 감정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번엔 또 어떤 고문입니까, 작가님?”
“고문이라뇨. 예술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물리 법칙을 배신하는 움직임이죠.”
그녀가 보여준 것은 댄스스포츠, 그중에서도 라틴 댄스의 여왕이라 불렸던 조안나 레우니스의 영상이었다. 김경훈의 세계에서 ‘춤’이란, 희미한 기억의 파편으로만 존재하는 단어였다. 15살 이전에 보았던 발레리나의 흑백 사진, 혹은 텔레비전 속 가수들의 흐릿한 군무 같은 것들. 그는 이 가장 시각적인 예술을, 과연 어떻게 읽어내야 할지 막막함을 느꼈다. 그의 발치에 엎드린 안내견 탱고만이 이 모든 상황과 무관하게 평온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제가 작가님의 눈이 되어 드리죠.” 마봉 드 포레가 말했다. “대신, 당신은 저의 뇌가 되어주세요. 제가 보는 것을, 당신의 언어로 번역해 주시면 됩니다.”
2. 축(軸)의 번역
노트북 스피커에서 경쾌한 차차차 음악이 흘러나왔다. 김경훈은 눈을 감았다. 그는 이제부터, 마봉 드 포레의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세계 속으로 들어갈 터였다.
“백금발의 숏컷, 거의 소년 같은 머리를 한 여자예요. 하늘하늘한 하얀색 의상을 입었고… 말랐어요. 그런데 그 마른 몸이 지금, 얼음판 위를 도는 팽이가 됐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건조했지만, 묘사는 정확했다.
“스핀. 끝없이 돌아요. 하지만 흐트러짐이 없어요. 축은 완벽하고, 속도는 점점 빨라지는데… 세상에, 저건 중력을 거스르는 움직임인데. 빙판도 아닌 마룻바닥에서 저게 어떻게 가능한 거죠?”
김경훈은 듣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묘사하는 ‘스핀’을 머릿속에 그리려 애쓰지 않았다. 대신, 그는 그 현상을 자신의 언어로, 즉 물리학과 정보학의 언어로 번역하고 있었다. ‘스핀’은 그에게 ‘극한의 속도 속에서 유지되는 완전한 안정성’이었다. 그것은 완벽하게 제어되는 시스템이었고, 모든 에너지가 단 하나의 축으로 수렴하는 가장 효율적인 상태였다. 그는 파트너인 마이클 말리토프스키의 존재를 느꼈다. 그는 스핀의 구심점이었고, 그녀에게 안정적인 회전축을 제공하는 보이지 않는 프레임워크였다.
“이제 멈췄어요. 방금 전의 광란이 거짓말이었다는 듯, 한순간에. 그리고 웃네요. 약간 병약해 보이는 쓰러질 것 같은 미소를.”
김경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알 것 같았다. 그녀의 춤은 시각적 과시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육체가 구현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데이터 처리 능력’을 증명하는 과정이었다. 혼돈(빠른 회전) 속에서 질서(완벽한 축)를 유지하는 것. 그의 연구와도 맞닿아 있는 지점이었다.
3. 관계의 문법
“이번엔 다른 춤이에요.” 마봉 드 포레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파소도블레. 투우사의 춤이죠. 남자가 투우사고, 여자는 그의 붉은 망토, 카포테가 됩니다.”
음악이 비장하게 바뀌었다. 그녀의 묘사도 달라졌다.
“남자가 그녀를 휘둘러요. 그런데…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아요. 그녀는 잡혀있는 게 아니라, 남자의 의지를 따라 자발적으로 폭발하고 흩날리는 것 같아요. 붉은 비단 조각처럼. 그 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아주 팽팽한 실이 연결된 것 같습니다.”
그 순간, 김경훈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마침내, 이 보이지 않는 춤의 ‘문법’을 이해했다.
“그건 실이 아닙니다, 작가님.”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건 ‘프로토콜’입니다.”
마봉 드 포레는 묘사를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리드는 하나의 ‘쿼리(Query)’입니다. ‘나는 지금부터 왼쪽으로 세 걸음 움직여 당신을 회전시키겠다’는 명확한 신호죠. 그러면 여자의 몸은 그 쿼리에 대한 가장 완벽한 ‘응답(Response)’으로 반응합니다. 한 치의 오차도, 불필요한 데이터도 없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정보 교환. 저는 지금 춤을 보는 것이 아니라, 가장 완벽한 형태의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을 ‘듣고’ 있는 겁니다.”
그는 자신의 옆에 엎드린 탱고를 생각했다. 그와 탱고의 관계 또한 그러했다. 하네스를 통해 전해지는 미세한 손의 압력은 ‘쿼리’였고, 그에 반응하는 탱고의 움직임은 ‘응답’이었다. 그들 사이에는 완전한 신뢰라는 이름의 프로토콜이 존재했다.
4. 각주(脚註)
영상이 끝나고, 연구실에는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마봉 드 포레는 노트북을 덮으며,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작가님이 본 조안나 레우니스는 뭐였죠? 댄서? 예술가?”
김경훈은 유쾌하게 웃었다. 그의 얼굴에 다시 따뜻하고 활기찬 표정이 돌아왔다.
“제가 본 그녀는… 가장 뛰어난 ‘정보 처리 장치’였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춤은 제가 평생을 바쳐 연구하고 설계하고 싶은 가장 완벽한 ‘사용자 인터페이스’였고요.”
그는 말을 이었다. “모든 정보가 손실 없이 오해 없이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전달되는 시스템. 어쩌면 제 연구의 끝은 조안나 레우니스의 저 스핀과 맞닿아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봉 드 포레는 잠시 말이 없다가 이내 그녀 특유의 건조한 웃음을 터뜨렸다. “젠장. 나는 그냥 예쁜 언니가 춤추는 걸 보여준 건데, 무슨 학위 논문을 한 편 써버리시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죽 재킷을 여몄다. “오늘의 번역료는 비싸게 받겠습니다, 작가님” 그녀는 윙크를 하듯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고는 비 내리는 어둠 속으로 다시 사라졌다.
김경훈은 혼자 남아, 텅 빈 노트북 화면과,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파소도블레의 격정적인 리듬을 생각했다. 그는 아이폰을 꺼내, 오늘의 경험에 대한 짧은 주석을 음성으로 남기기 시작했다.
*‘제목: 보이지 않는 스핀에 대한 각주.
춤은 시각 예술이 아니다. 그것은 두 개의 신뢰 기반 노드(node)가 실시간으로 데이터를 교환하는 가장 완벽한 형태의 통신 프로토콜이다. 조안나 레우니스의 스핀은 그 프로토콜이 도달할 수 있는 극한의 효율성과 안정성을 증명하는 하나의 사건이다. 결론: 가장 아름다운 것은 가장 완벽하게 소통하는 것이다.’*
메모를 마친 그는 손을 뻗어, 발치에서 잠든 탱고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탱고가 만족스러운 듯 꼬리로 바닥을 ‘툭, 툭’ 쳤다. 그것은 그들만의, 고요하고도 완벽한 파소도블레였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