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 것인가?’ 인류의 가장 오래된 이 질문 앞에서 현대인은 대체로 두 가지 방식으로 응답한다. 첫째, 거대한 서사를 수입하는 것이다. ‘열정’, ‘혁신’, ‘성장’과 같은 시대의 키워드를 자신의 삶에 이식하고, 그 서사가 요구하는 페르소나를 연기하며 살아간다. 둘째, 질문 자체를 회피하는 것이다.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콘텐츠의 파도에 몸을 맡긴 채, 사유의 고통을 잊고 감각의 쾌락 속으로 표류한다. 그러나 이 두 방식 모두, 결국은 우리를 공허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정녕 길은 없는 것일까. 이것은 거대한 담론의 미로 속에서 길을 잃은 한 남자가 가장 작고 일상적인 행위 속에서 발견한, 하루치씩의 생존에 관한 기록이다.
1. 개념의 미로
김경훈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잠시 멈췄다. 그의 연구실은 완벽한 침묵과 질서의 공간이었지만, 그의 내면은 지금 폭풍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화면낭독기가 쉴 새 없이 쏟아내는 하이데거와 푸코의 문장들이 그의 머릿속에서 의미를 잃고 유령처럼 떠다녔다. 그는 지금 ‘디지털 시대의 실존적 불안과 정보 구조의 상관관계’라는 그 자신도 완전히 감당하기 벅찬 주제의 논문과 씨름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굳게 닫힌 입술은 내면의 사투를 암시했다. 그는 세상을 ‘정보’라는 렌즈로 분석하는 학자가 되기를 꿈꿨다. 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개념의 미로 속에서 길을 잃고 있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이 거대한 질문이 수만 개의 각주와 참고문헌의 무게로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는 자신이 설계하는 정보의 구조가 과연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는지 회의했다. 한 방의 주사가 아니라 한 마디의 말이 사람을 살린다는 것을 깨달았던 병원에서의 3년. 지금 그의 언어는 누구를 살리고 있는가.
“크응….”
그의 발치에 엎드려 있던 안내견 탱고가 주인의 불안을 감지한 듯 낮은 신음 소리를 냈다. 녀석의 따뜻하고 축축한 코가 그의 손등에 와닿았다. 그것은 시스템을 종료하라는 가장 명료하고 따뜻한 신호였다. 김경훈은 길게 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탱고. 밥 먹으러.”
2. 온기의 인터페이스
그와 탱고가 향한 곳은 연구실 뒷골목의 허름한 백반집이었다. ‘경주식당’이라는 상호가 낡은 아크릴판 위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문을 열자, 멸치육수와 된장, 그리고 고소한 기름 냄새가 그의 후각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의 세계에서 이 식당은 가장 완벽한 ‘인터페이스’를 가진 공간이었다. 복잡한 메뉴판도, 키오스크도 없었다. 그저 문을 열고 들어가 익숙한 자리에 앉으면,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왔는가.”
주방 안쪽에서 주인 할머니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곧, 삶의 고단함이 그대로 새겨진 굵은 마디의 손으로 서너 가지의 반찬을 그의 앞에 ‘툭, 투둑’ 소리를 내며 내려놓았다. 그녀의 얼굴을 본 적은 없었지만, 김경훈은 머릿속으로 그녀의 모습을 그릴 수 있었다. 깊게 팬 주름과,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하면서도 그 안에 단단한 온기를 품고 있는 그런 얼굴일 터였다.
그는 밥을 먹기 시작했다. 따뜻한 쌀밥, 아삭한 콩나물무침의 질감, 칼칼한 김치찌개의 맛. 그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던 현란한 개념들이 이 단순하고 확실한 감각의 세계 앞에서 서서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는 오직 씹고, 삼키고, 느끼는 행위에만 집중했다. 이것은 생존의 가장 원초적인 의식이었고, 그의 지친 정신을 땅으로 단단히 붙들어 매주는 닻과도 같았다. 탱고는 테이블 아래에서 사료와는 다른 이 풍부한 음식의 냄새를 맡으며 조용히 꼬리를 흔들었다.
3. 하루치의 설교
그날따라 그의 수저질은 유난히 느렸다. 그의 얼굴에 드리운 수심을, 주인 할머니는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뚝배기 그릇을 치우며, 평소와 달리 그의 맞은편에 잠시 걸터앉았다.
“사는 게 힘든가.”
그녀의 목소리는 질문이라기보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통보에 가까웠다. 김경훈은 대답 대신 희미하게 웃었다. 그의 복잡한 고뇌를 이 노인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할머니는….” 그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어떻게 사십니까. 매일 똑같은 하루가 지겹지 않으세요?”
그녀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마치 세상의 모든 이치를 담은 경전을 읊듯, 나지막이 말했다.
“지겨울 틈이 어딨나. 나는 그냥, 내일 아침엔 손님들한테 시래깃국을 끓여줄까, 아니면 얼큰한 콩나물국을 끓여줄까, 그거 생각하다 잠들어. 아침에 일어나면, 어제 생각한 그거 끓여서 배고픈 사람들 먹이고, 빈 그릇 설거지하고, 저녁 장사 준비하고. 그렇게 또 저녁 손님들 밥해 먹이고 나면 하루가 가는 거지. 사는 게 뭐 별건가. 그냥, 하루치씩 사는 거야. 내일 먹을 거 걱정하면서.”
그 순간, 김경훈은 마치 거대한 종에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의 머릿속을 떠돌던 수만 개의 단어와 이론들이 그녀의 이 단순한 문장 앞에서 한순간에 먼지처럼 흩어졌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거대한 질문은 ‘내일 무엇을 끓일 것인가’라는 작고 구체적인 질문 앞에서 힘을 잃었다.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치유의 ‘말’은 위대한 철학자의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매일의 노동 속에서 삶의 가장 구체적인 고민 속에서 단련된, 이 늙은 여인의 목소리 속에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살아가는 ‘방법’을 설교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을 보여주었을 뿐이었다.
4. 내일의 메뉴
그는 식당을 나섰다. 차가운 저녁 공기가 그의 뺨을 스쳤지만, 그의 내면은 이상하게도 따뜻했다. 그는 더 이상 개념의 미로 속을 헤매고 있지 않았다. 그의 발은 단단하게 땅을 딛고 있었다.
연구실로 돌아온 그는 컴퓨터를 켜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점자 기록계를 꺼내, 새로운 파일을 열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한 자 한 자 입력하기 시작했다.
‘내일 아-침-메-뉴-.’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의 굳어 있던 얼굴 근육이 부드럽게 풀리며, 아주 오랜만에 편안한 미소가 떠올랐다.
‘시-래-기-국-.’
그것은 논문도, 철학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내일 아침을 위해 스스로에게 처방한, 가장 확실하고 따뜻한 약이었다. 발치에서 그의 평온함을 느낀 탱고가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잠이 들었다. 세상의 모든 복잡함으로부터, 그는 그렇게 하루치만큼의 자유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