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무지의 베일 뒤에서 도시를 설계하는 법

by 김경훈


정의(正義). 우리는 이 단어를 법정의 판사나 고대의 철학자에게 독점된, 거대하고 추상적인 개념이라 착각한다. 그러나 21세기의 정의는 때로 아주 작은 것들 안에 깃든다. 그것은 보도블록의 턱을 1센티미터 낮추는 설계자의 세심함이고, 키오스크 화면에 음성 안내 기능을 추가하는 개발자의 공감 능력이며, 식당 메뉴판에 쉬운 글자를 병기하는 주인의 배려다. 정의란 결국, ‘가장 약한 자’의 세상을 상상하는 능력에 대한 문제다. 이것은 눈을 감고서야 비로소 가장 공정한 세상을 볼 수 있었던 한 남자가 도시의 설계자들에게 던진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이야기다.



1. 완벽한 청사진의 오만함


늦가을의 햇살이 대구 시청의 통유리창을 통과해, 길고 가는 먼지의 띠를 공중에 그려내고 있었다. 회의실의 공기는 잘 내려진 커피의 고소한 향과 레이저 프린터의 마른 토너 냄새, 그리고 젊은 야심이 내뿜는 미세한 열기로 가득했다. 김경훈은 이 모든 감각의 한가운데에, 섬처럼 고요하게 앉아 있었다. 그의 발치에는 안내견 탱고가 이 지루한 인간들의 회의와는 무관하다는 듯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의 앞에서는 얼마 전 ‘꼬리의 철학’에 대한 문답을 나눴던 대학원생 박민준이 이제는 시청의 스마트시티 프로젝트를 수주한 IT 기업의 팀장이 되어, 화려한 프레젠테이션을 펼치고 있었다.


“저희가 제안하는 ‘D-키오스크’는 시민들에게 가장 빠르고 직관적인 정보 경험을 제공할 것입니다.”


민준의 목소리에는 성공한 젊은 리더의 자신감이 넘쳤다. 스크린에는 눈부신 디자인의 키오스크 이미지가 떠 있었다. 거대한 풀터치 스크린, 제스처 인식 기능, AI 기반의 개인 맞춤형 정보 제공. 그것은 기술의 정수였고, 효율성의 찬가였으며, 완벽한 청사진의 오만함 그 자체였다. 그의 창백하고 지적인 얼굴 위로, 김경훈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유쾌한 ENFJ 답게 박수를 치며 민준의 발표를 격려했지만, 그의 머릿속은 이미 차가운 분석에 돌입한 후였다. 그는 그 완벽한 청사진 속에서 보이지 않는 수많은 그림자들을 보고 있었다.



2. 무지의 베일을 드리우다


발표가 끝나고, 회의를 주재하던 최 사무관이 그에게 발언 기회를 주었다. “김경훈 박사님, 정보 접근성 전문가로서 고견을 부탁드립니다.”


김경훈은 마이크를 당기는 대신, 상체를 살짝 앞으로 기울였다. 그의 움직임 하나만으로도 소란스럽던 회의실의 공기가 집중의 밀도를 띠기 시작했다.


“발표 잘 들었습니다, 박 팀장님.” 그의 목소리는 따뜻하고 유쾌했다. “마치 잘 만든 SF 영화의 예고편을 본 기분입니다. 다만, 모든 SF 영화가 그렇듯, 저는 그 멋진 신세계에서 소외될지 모를 사람들에 대해 먼저 생각하게 되는군요.”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여러분께, 존 롤즈라는 철학자가 제안한 아주 오래된 사고 실험을 하나 제안하고 싶습니다.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이라는 게임입니다.”


그는 자신의 보이지 않는 눈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응시하듯,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지금부터 우리는 이 도시에 태어나기 직전의 존재가 되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가 남성일지 여성일지, 부자일지 가난할지, 건강할지 아닐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휠체어를 탄 외국인 노동자일 수도, 저처럼 앞을 보지 못하는 연구원일 수도, 혹은 글을 읽지 못하는 노인일 수도 있죠.”


회의실 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박민준의 자신감 넘치던 얼굴에, 낯선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자, 이 무지의 베일 뒤에서 우리는 우리가 살아갈 도시의 키오스크를 설계해야 합니다.” 김경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여러분이라면, 오직 시각 정보와 정교한 손가락 터치에만 의존하는 시스템을 만드시겠습니까? 제한 시간 안에 복잡한 메뉴를 통과해야만 하는 시스템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마 아닐 겁니다. 여러분은 혹시 모를 ‘최악의 나’를 위해, 가장 안전하고 관대한 시스템을 설계할 겁니다. 물리적 버튼을 만들고, 모든 과정에 음성 안내를 넣고, 그림과 쉬운 단어를 함께 사용하겠죠. 그것이 바로 정의의 출발점입니다.”



3. 가장 약한 자를 위한 설계


최 사무관이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의 얼굴에는 예산과 마감 기한이라는 현실의 무게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박사님 말씀은 깊이 공감합니다만… 그렇게 되면 비용과 시간이….”


“물론입니다.” 김경훈은 유쾌하게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그래서 롤즈는 ‘차등의 원칙(Difference Principle)’이라는 두 번째 카드를 제시합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배려, 즉 접근성 기능의 추가는 비용이나 손실이 아닙니다. 그것은 시스템 전체를 더 강하고 안정적으로 만드는 가장 확실한 투자입니다.”


그는 자신의 아이폰을 가볍게 두드렸다. 화면낭독기가 그의 손가락 움직임에 따라 메뉴를 읽어 내렸다.

“제가 아이폰을 쓰는 이유는 애플이 저를 동정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시스템 설계의 가장 초기 단계부터, 저와 같은 ‘가장 약한 사용자’를 고려했습니다. 그 결과, 아이폰은 저뿐만 아니라 노인, 어린이 기계에 익숙지 않은 모든 사람에게 가장 직관적이고 쉬운 기기가 되었죠. 가장 약한 자를 위한 설계가 결국 모두를 위한 가장 강력한 설계가 된 것입니다.”


그의 말은 한때 예수회 사제를 꿈꾸며 깨달았던 ‘치유로서의 언어’ 그 자체였다. 그는 기술의 언어가 아니라, 철학과 공감의 언어로 그들을 설득하고 있었다. 그는 이 도시의 시스템 설계자들에게, 마음을 치유하는 ‘심의(心醫)’로서 말을 건네고 있었다.



4. 주석


회의가 끝났을 때, 회의실의 공기는 시작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기술에 대한 흥분은 가라앉고, 그 자리를 인간에 대한 묵직한 성찰이 채우고 있었다. 박민준은 말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완벽한 청사진이 사실은 얼마나 많은 사람을 배제하는 오만한 설계였는지를 깨달은 듯했다.


김경훈은 탱고와 함께 시청을 나섰다. 늦가을의 공기는 차갑지만 상쾌했다. 그는 오늘, 코드를 수정하거나 기술을 제안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하나의 질문을 던졌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그 질문이 이 도시를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만들 것이라 믿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아이폰을 꺼내 음성 메모를 시작했다.

*‘제목: 정의로운 인터페이스에 대한 단상.

롤즈의 정의론은 철학이 아니라, 가장 뛰어난 UX(사용자 경험) 설계 지침서다. ‘무지의 베일’은 사용자의 다양성을 상상하는 가장 완벽한 페르소소나 기법이며, ‘차등의 원칙’은 최소 기능 제품(MVP)이 아니라, ‘최소 약자 보호(Minimum Viable Protection)’가 시스템의 핵심임을 상기시킨다.

결론: 정보 접근성 연구는 결국, 코드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설계하는 일이다. 무지의 베일 뒤에서 우리는 비로소 가장 선명한 설계도를 볼 수 있다.’*


메모를 마친 그는 아이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탱고가 그의 손에 머리를 비볐다. 그는 웃으며 녀석의 등을 쓰다듬었다. 저 멀리, 대구의 스카이라인이 석양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불완전하고, 수많은 문제를 가진 도시. 하지만 오늘, 그 도시의 설계자들은 아주 잠시나마 눈을 감고, 가장 약한 자의 눈으로 도시를 바라보는 법을 배웠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연구의 시작일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어떤 빛의 편애(偏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