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의 계절
봄이었다. 김경훈은 도서관을 나와 교정 벤치에 앉았다. 그의 곁에는 안내견 탱고가 얌전히 엎드려,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지열을 피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볼 수 있어서 감는 것이 아니라, 오직 느끼기 위해 감는 눈이었다. 그의 피부는 특히 얼굴의 예민한 살갗은 그에게 세상을 번역해 주는 또 다른 종류의 망막이었다.
봄볕은 날카로웠다. 그것은 온기라기보다, 수만 개의 미세한 바늘이 피부를 콕콕 찌르는 듯한 감각에 가까웠다. 대기는 건조했고, 먼지 냄새가 섞인 바람이 불 때마다 눈두덩이 까슬까슬했다. 그는 이 공격적인 빛을 '며느리의 볕'이라 불렀다.
"선배님, 오늘 날씨 정말 좋지 않아요?"
목소리의 주인은 그의 연구를 돕는 대학원생, 이봄이었다. 이름처럼 봄의 생기를 머금은 그녀는 반짝이는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녀의 뺨은 기분 좋게 상기되어 있었다.
김경훈은 대답 대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얼굴은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었지만, 입꼬리가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계산을 짐작하게 했다.
"봄 씨는 잘 모르겠지만, " 그가 입을 열었다. "이 빛, 꽤나 폭력적인 빛입니다. 태양의 고도는 높아지고 습도는 낮아, 자외선이라는 칼날이 아무런 방해 없이 우리 피부에 와닿죠. 옛 어른들은 이런 볕에 며느리를 내보내 일을 시켰다고 합니다. 귀한 딸은 집에 들여놓고서."
이봄의 얼굴에서 생기가 가셨다.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강의를 할 때처럼 차분하고 논리 정연했다.
"정보와 비슷해요.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정보(raw data)는 폭력적일 수 있습니다. 맥락도, 체계도 없이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사람들은 길을 잃고, 상처를 입죠. 꼭 이 봄볕처럼 말입니다. 모든 것을 볼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사실은 가장 많은 유해 정보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셈입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탱고가 낑, 하고 낮은 신음 소리를 냈다. 녀석은 더 서늘한 그늘을 찾아 벤치 아래로 몸을 더 깊숙이 구겨 넣었다. 김경훈은 손을 뻗어, 마치 그 마음을 안다는 듯 탱고의 등을 부드럽게 두드려주었다.
2. 견딤의 계절
여름 내내 그는 연구실에 머물렀다. 대구의 여름은 끈적하고 무거운 공기로 가득 찬, 거대한 수족관과도 같았다. 그는 세상의 모든 소리가 물속에서처럼 둔탁하게 들려온다고 생각했다. 탱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배를 대고 누워 보냈다. 그것은 견딤의 시간이었다.
3. 딸의 계절
가을이 왔다. 10월의 어느 토요일 오후, 그는 다시 그 벤치에 앉아 있었다. 공기의 질감이 달라져 있었다. 건조한 날카로움 대신, 적당한 습기를 머금은 부드러움이 그의 피부를 감쌌다. 빛은 더 이상 찌르는 바늘이 아니었다. 그것은 따뜻하고 너그러운 손길이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마치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온기를 온전히 받아내려는 듯 얼굴을 하늘로 향했다. 그의 굳어 있던 입매가 평온하게 풀렸다.
"오늘은 정말 좋은 빛이네요."
어느새 다가온 이봄이 그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그녀는 지난봄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듯,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살폈다.
"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딸의 볕입니다."
그는 말을 이었다. "태양의 고도가 낮아지고, 대기 중의 수증기가 천연 필터 역할을 해주죠. 유해한 자외선은 걸러지고, 우리 몸에 비타민 D를 합성하는 데 꼭 필요한 이로운 빛만 남습니다. 옛 어른들은 이런 볕 아래 딸을 내보내 거닐게 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이었겠죠."
탱고는 그의 발치에서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누워 가을볕을 온몸으로 받고 있었다. 녀석의 금빛 털이 부드러운 햇살 아래서 윤기 나게 빛났다.
김경훈은 자신의 연구 분야인 '정보 접근성'에 대해 생각했다. 그가 하는 일이란, 어쩌면 세상의 모든 정보를 이 '딸의 볕'처럼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저는 세상을, 정보의 과잉과 결핍이라는 두 가지 폭력으로 가득 찬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봄볕처럼 무분별하게 쏟아지는 날것의 정보는 사람들을 지치게 하고, 어떤 이들에게는 아예 정보가 닿지 않는 기나긴 극야(極夜)의 어둠도 존재하죠. 제가 하는 일은 그 봄볕의 유해한 광선을 걸러내고, 어둠 속에는 빛을 배달하는 일입니다. 모든 정보가 이 가을볕처럼, 모두에게 이롭고 평등한 온기가 되도록 설계하는 것. 그것이 제 연구의 목표입니다."
이봄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처음으로, 그의 보이지 않는 눈 너머에 있는 누구보다 세상을 명료하게 보고 있는 한 남자의 세계를 엿본 기분이었다. 그의 얼굴은 학자의 고집스러움과,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는 자의 깊은 평온함이 기묘하게 공존하고 있었다.
김경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탱고." 그의 말에 탱고가 기지개를 켜며 몸을 일으켰다. 하네스를 고쳐 맨 그와 탱고는 다시 하나의 몸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낙엽이 융단처럼 깔린 길을 따라, 쏟아지는 황금빛 햇살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는 볼 수 없었지만, 알고 있었다. 지금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 색으로 물들어 있는지를. 그는 눈이 아닌 온몸으로, 편애하듯 따사로운 이 가을의 빛을 남김없이 흡수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평생을 바쳐 세상에 선물하고 싶은 바로 그 빛이었다.